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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역사 탐구 생활</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link>
    <description>오늘의 이슈가 내일의 역사다. </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Fri, 19 Jun 2026 18:48: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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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역탐생</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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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역사 탐구 생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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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KBS 대하드라마 &amp;lt;고려 거란 전쟁&amp;gt; 역사적 배경 1. 고려 현종의 출생의 비밀</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6</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즘 KBS 대하드라마 &amp;lt;고려 거란 전쟁&amp;gt;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대하드라마 &amp;lt;고려 거란 전쟁&amp;gt;은 1010년 강조의 정변으로 시작한 거란의 2차 침략부터 귀주대첩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거란의 1차 침략과 그전에 스토리가 빠졌습니다. 특히 배우 김동준이 연기한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왜 절에서 살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는지는 드라마에서 잘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드라마 급의 막장 스토리를 가진 고려 현종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보겠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2 data-ke-size=&quot;size26&quot;&gt;고려 현종의 출생의 비밀&amp;nbsp;&lt;/h2&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왕씨 성을 주는 사성정책과 호족들의 딸과 결혼하는 혼인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렇게 정식 왕비만 29명, 왕자만 25명이 되었으니 왕건 사후 고려 조정은 왕권 다툼으로 혼돈의 카오스에 빠졌습니다. 이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왕건의 셋째 아들이 제4대 왕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광종입니다. 광종은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형제, 조카, 친척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왕족의 씨를 말려버릴 정도로 대대적인 숙청을 했습니다. 그 덕에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있던 고려 조정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자기 아들에게 물러주니 그가 고려 제5대 왕 경종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도 울고 갈 근친혼이 시작됩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선 그 당시에는 근친혼을 하여 핏줄의 존엄성과 차별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서슴없이 족내혼을 했습니다. 당연히 경종도 사촌들과 결혼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 번째 부인과 네 번째 부인은 서로 친자매였고 그녀들이 바로 천추태후와 헌정왕후입니다. 다시 말해 천추태후와 헌정왕후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넷째 부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경종은 아버지 광종의 이복동생의 딸, 그러니까 사촌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경종과 천추태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제7대 왕이 되는 목종입니다. 그러나 병약한 경종은 목종을 낳은 뒤 1년 만에 죽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경종은 갓난아기인 목종에게 왕위를 물러줄수 없자 천추태후와 헌정왕후의 친오빠, 즉 자신의 사촌이자 목종의 외삼촌인 성종에게 왕위를 물러줬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종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분명히 경종은 외아들 목종만 낳고 죽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아침드라마 급 막장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경종이 죽자 헌정왕후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본궐에서 나와 왕륜사 남쪽의 자택에서 지냅니다. 그런데 태조 왕건의 다섯 번째 부인인 신성왕후의 아들인 안종 왕욱 역시 왕륜사 근처에 살아 서로 왕래하다가 사랑에 빠져 관계를 맺었습니다. 결국 둘은 야합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임신부터 해버리는데 두 사람의 문제는 바로 삼촌과 조카 관계라는 것이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일단 인척관계를 자세히 보면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과 넷째 부인인 신정왕후의 아들인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조 왕건의 친손녀이며 안종 왕욱은 태조 왕건과 다섯째 부인인 신성왕후의 아들로 헌정왕후의 아버지 대종 왕욱의 이복동생이니 헌정왕후는 왕욱의 조카딸입니다. 다만 이복남매간의 근친혼도 당연시되던 고려 왕실의 당시 풍습으로 숙질간 혼인은 여차저차 융통성 있게 볼 수 있는 정도였으나 헌정왕후는 그냥 과부가 아니라 선왕 경종의 왕후였고 게다가 왕욱도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즉 한 국가의 왕후가 숙질간의 근친상간으로 사생아를 낳은 것도 모자라 버젓이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을 상대로 불륜을 저지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야말로 아침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현실에 구현된 셈입니다. 그리고 헌정왕후와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그 사생아가 바로 &amp;lt;고려 거란 전쟁&amp;gt;에 나오는 현종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결국 성종 재위 11년(992년) 7월 1일 밤, 이 막장 스토리 같은 현실을 본 헌정왕후의 노비들이 소동을 피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헌정왕후는 만삭의 몸으로 숙부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노비들이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을 이렇게 계속 알면서 숨기다가 자기들도 같이 죽겠다 싶었던지 마당에 짚을 모아 큰 불을 일으켰습니다. 이 부분에서 과거 신라시대 때 김유신이 여동생 문희의 임신을 왕에게 알려 김춘추와 결혼시키기 위해 벌였던 화형 쇼가 떠오르는 부분으로, 자신들이 모시던 주인들의 관계를 공식화시켜 폭로든 처벌이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태조의 아들 집에 불이 났으니 온 조정이 난리가 나 불을 끄러 갔습니다. 심지어 성종까지 직접 출동했다가 한밤 중 그 집에 있던 만삭인 여동생을 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들통나 버리고, 평소 유교를 고려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싶었던 도덕군자 성종은 막장 스토리에 화나 스캔들을 일으킨 안종을 즉시 사수현으로 유배 보냅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만삭의 몸으로 이 난리를 겪은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대문에 이르자마자 산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면서 현종을 낳다가 결국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amp;lt;고려사&amp;gt;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현종은 태조 왕건의 친손자인 동시에 외증손자 라는 어마무시한 정통성을 가진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헌정왕후가 죽고 난 뒤 그래도 여동생이 낳은 조카라고 외삼촌인 성종이 신경을 써 유모에게 맡겨 도성인 개성에서 키웠습니다. 유모는 아기였던 현종에게 &quot;아빠&quot;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는데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성종을 보더니 &quot;아빠&quot;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성종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quot;아빠&quot;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에 성종은 부모없이 자라는 현종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현종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내려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고려 왕실의 불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다음으로 불륜을 저지른 것은 바로 목종의 엄마이자 현종의 이모이자 헌정왕후의 친언니인 천추태후였습니다. 다음 편에는 막장 오브 더 막장인 천추태후와 김치양, 그리고 목종의 사랑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한국사</category>
      <category>고려 거란 잔쟁</category>
      <category>고려 성종</category>
      <category>고려 현종</category>
      <category>대하드라마</category>
      <category>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category>
      <category>목종</category>
      <category>천추태후</category>
      <category>헌정왕후</category>
      <category>현종 가계도</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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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7 Dec 2023 18:21:1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역사적 이유!! 영국의 희대의 부동산 사기 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요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공격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최후통첩을 하며 가자지구에 진입해 군사작전을 펼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하마스와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도 확전 가능성을 언급하며 맞서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전쟹을 벌이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슬람 문화권의 한복판에 유대교 국가가 생겼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영국이 벌인 역사상 희대의 부동산 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역사적 이유인 영국의 희대의 부동산 이중계약이자 사기인 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2 data-ke-size=&quot;size26&quot;&gt;영국이 벌인 역사상 희대의 부동산 사기인 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lt;/h2&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국이 벌인 역사상 희대의 부동산 사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 이후 유럽에 기독교가 펴지자 유대인들은 차별과 핍박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유도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고 예수를 사이비로 몰았기에 기독교가 절대적인 가치였던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거의 역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자유와 인권을 중요시하는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정부들은 유대인에게 공민권(군주국의 신민)과 시민권(공화국의 시민)을 부여하면서 가시적으로 핍박과 차별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근 1800여 년 넘게 이어진 반유대주의 감정이 그리 쉽게 사라질 리 없었습니다. 특히 산업화로 소외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은 유대인의 이미지를 자신을 착취하는 악덕 지주나 부르주아와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극우세력은 대중 사이의 만연한 반유대주의 감정을 적극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 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더욱 악화되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사태가 제정 러시아에서 포그룸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유대인 학살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중에서도 유대인들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은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으로 1894년에 프랑스 정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파이 누명을 덮어씌워 종신형을 때려버린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기독교인들과 함께 동화되어 살려고 노력하던 유대인들은 아무리 자신들이 기독교 중심의 주류 사회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유대인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고, 이럴 바에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려서 우리들끼리 모여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일조헀습니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여기에 동감하면서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께서 자신들에게 고대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가라고 명령했던 일명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즉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국가를 건국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헤르츨은 1896년 &amp;lt;유대 국가&amp;gt;(Der Judenstaat)라는 저서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를 재건할 것을 역설하고 결국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듬해인 1897년 시온주의자 세계대회(ZO)의 수립으로 점차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어 나갑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습니다. 유선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튀르키예 민족의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으며 로마 제국 이후 이슬람 제국들에게 정복당하여 무슬림 문화권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자본력이 탄탄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힘을 발휘해 1903년 헤르츨은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대신 우간다에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은 어떻느냐'라는 제안을 받자 비교적 긍정적으로 검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 헤르츨은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유대인들의 수장이 된 저명한 화학자이기도 했던 하임 바이츠만은 '오로지 조상들이 살았던 팔레스타인만이 우리들의 터전이 될 수 있다.'라며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이었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적국이 되면서 하임츠만의하임츠만의 주장이 탄력을 받았고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은 열성 시온주의자였던 당시 영국 내무 장관 허버트 세뮤얼이었습니다. 이어서 1916년 영국은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한다'는 내용의 비밀 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비밀 협정에 의거하여 팔레스타인 일대는 영국의 관할로 들어오는 것이 계획되면서 헤르츨과 하임츠만의 주장이자 유대인들의 염원인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국가를 건국하자는 시오니즘 운동의 주장이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쟁의 장기화로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 정부는 로스차일드 가문 등의 유대인 자본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전쟁의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 정부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국가를 건국하고 싶은 유대인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amp;nbsp; 마침내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교부 장관인 아서 밸푸어의 명의로 당시 영국 내 유대인들의 대표자 격이었던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가 공식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amp;nbsp;&lt;/p&gt;
&lt;blockquote data-ke-style=&quot;style3&quot;&gt;본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를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amp;nbsp;&lt;/blockquote&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 입니다. 이 선언으로 영국 정부는 로스차일드 가문 등의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전쟁자금을 빌렸고 하임츠만을 비롯한 유대인 지도자들도 전반적으로는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의 수 역시 급증합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대인 국가가 아무런 문제 없이 건국되는 줄 알았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진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상황이 역사적으로 펼쳐집니다. 바로 영국 정부가 불과 1년 전인 1915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아랍인들에게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 민족의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밸푸어 선언과 똑같은 내용의 약속을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외교관인 헨리 맥마흔은 메카의 하심 가문 아미르인 후세인 빈 알리와 서로 서신을 주고 받음으로서 레바논, 시리아 서부를 제외한 중동 지역 오스만 제국의 영토의 독립 지지를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세인 맥마흔 협정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협정을 통해 영국 정부는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아랍 지역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워주는 것을 약속하면서 당시 적국이던 오스만 제국의 뒤통수를 치라고 독려와 지원을 했고, 이에 아랍인들은 이것을 믿고 1916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영국의 역사상 희대의 부동산 사기극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영국 입장에서 아예 할 말이 없던 것은 아닌 게 맥마흔 협정에 따르면 '전후 아랍인들의 국가에서 시리아 일대는 제외한다.'라고 적혀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일대를 어디까지 봐야 할지는 애매모호했지만 팔레스타인 일대 역시 시리아 일대로 보자면 볼 수 있는 범주였던 것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지만 분명히 영국이 이 협정을 맺은 이유는 영국의 입장에서 골칫거리인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아랍인들을 이용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맥마흔 협정의 내용은 성공하여 오스만 제국이 1922년 멸망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영국은 아랍인들과의 약속은 물론 유대인들과의 약속도 지킬 마음이 없었습니다. 영국은 1916년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 어떻게 땅을 나눠먹을지에 대해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비밀리에 맺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즉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 정도를 공유하고 모든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직접 지배해 버리기로 했습니다. 즉 영국은 그야말로 보증금만 받고 결국 자기 땅으로 하겠다는 전형적인 부동산 사기의 표본인 삼중으로 계약을 맺어 국익을 극대화하겠다는 포석이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되자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후세인 맥마흔 협정에서 말한 '시리아 일대'가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졌으며,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을 규탄하면서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단호히 표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역사가 대차게 꼬여버리기 시작하는데, 벨푸어 선언 20일 뒤인 11월 23일, 러시아 제국을 뒤엎은 볼셰비키들이 공식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공개해 영국의 희대의 부동산 사기를 만천하에 까발린 것입니다. 안 그래도 밸푸어 선언 이후 20일 동안 그래도 영국이 괜찮은 국가겠지라며 협상을 생각하던 아랍인들은 몇 술 더 뜬 삼중계약의 진실을 알고 경악했고, 유대인 지도자와 자본가들도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이 벌인 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희대의 부동산 사기는 대차게 꼬여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영국은 이젠 아예 오스만 제국에게 협상국으로 전환한다면 팔레스타인을 오스만 제국에게 보전할 것임을 타전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밸푸어 선언과 맥마흔 협정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서서히 흐지부지되어 갔으며, 영국의 약속만 믿고 이주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을 놓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원인입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오늘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 역사적 이유인 영국의 희대의 부동산 삼중계약이자 사기인 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영국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외교정책적인 부분으로만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절묘한 정책입니다. 그리고 그런 외교정책은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소국한테 씁니다. 우리 정부도 이런 부분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밸푸어 선언이 흐지부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했을까요??&lt;/p&gt;</description>
      <category>세계사</category>
      <category>로스차일드 가문</category>
      <category>맥마흔 협정</category>
      <category>맥마흔 협정과 밸푸어 선언</category>
      <category>밸푸어 선언</category>
      <category>영국</category>
      <category>유대인</category>
      <category>이스라엘</category>
      <category>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이유</category>
      <category>팔레스타인</category>
      <category>후세인 맥마흔 협정</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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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Oct 2023 02:01:55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스라엘 기습공격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선포에 중동전쟁 우려!!</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정파 하마스가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여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이스라엘이 즉각 보복 공격에 나섰으며 레바논에 있는 이슬람 무장 단체인 헤즈볼라도 이스라엘 북부를 폭격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충돌이 신(新) 중동전쟁 수준으로 확전 될 위험이 커졌습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8일 성명을 통해 &amp;ldquo;우리는 길고 어려운 전쟁에 진입했다&amp;rdquo;며 전쟁 개시를 공식 선언했고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가자지구를 폭격하며 &amp;lsquo;철(鐵)의 검&amp;rsquo;이라고 명명한 보복 공격을 시작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 같은 전쟁은 현지 시각 10월 7일 오전 6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가 5~7천여 개의 드럼통으로 만든 수제 로켓과 까삼 로켓을 반반 비율로 이스라엘 남부에 기습 공격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아이언 돔은 로켓 공격을 방어한다고 병력이 한쪽에 모두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로켓 격추에 실패한 이스라엘 국경 방어군이 큰 타격을 입고 메르카바 전차가 불타오르는 등의 혼란을 틈타 서남쪽 국경으로 몰래 침입한 수십여 명의 하마스 특수작전부대들이 양측의 국경을 지키던 이스라엘 군인들을 사살하면서 이스라엘 남쪽 국경 방어선이 무너졌고, 이를 통해 하마스의 대규모 병력이 침공에 성공하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후 하마스 무장대원들은 탑승 차량을 이스라엘 군용 및 민간 차량으로 위장하고서 도시 깊숙이 침투하여 민간인들을 최대한 많이 학살하려고 이스라엘 정착촌의 여러 아파트의 모든 출구를 불과 폭약으로 막았으며, 가자 지구에 인접한 이스라엘군 기지와 정착촌을 다수 점령했습니다. BBC 등 외신에 따르면 로켓은 주요 시설 외에도 민간구역에 다수 떨어져 건물 붕괴와 차량 파괴 등 피해가 속출했으며 하마스 특수작전부대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 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이스라엘 총리는 8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현지 매체인 일타임스 오브 이스라엘 등은 8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보건당국 관리를 인용해 하마스의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700명을 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마스 무장대원이 침투한 이스라엘 남부 지역의 상황이 정리되면서 지난 7일 300명에 불과했던 사망자 수가 2배 이상 늘었으며 이스라엘 남부 레임 키부츠의 음악 축제 행사장 주변에서는 260구의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현지 응급구조단체 자카(ZAKA)가 밝혔습니다. 이 단체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받아 숨진 희생자들의 사체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이스라엘의 집중 공습이 이어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사망자도 400명을 넘어섰습니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이날 오후까지 집계된 사망자가 413명이며, 이 가운데 아동과 청소년이 78명, 여성이 41명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양측의 사망자를 합하면 1100명이 넘으며 이 가운데 외국인도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부상자 수도 급격하게 늘고 있으며 현재까지 이스라엘에서는 2100명, 가자지구에서는 2300명이 부상자로 집계돼 양측 부상자 합계는 4400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사상자는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상을 입은 부상자가 적지 않은 데다, 분리장벽을 넘어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 침투한 하마스 대원들이 주민 등을 인질로 붙잡고 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실제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이스라엘 주민 등 100명 넘는 인질을 붙잡고 있다고 8일 주장했습니다. 하마스 고위 인사인 무사 아부 마르주크가 이날 아랍어 매체 알가드에 이같이 말했다고 AP 통신은 전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같은 날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무장세력인 이슬라믹 지하드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30명 이상의 이스라엘인을 억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여성과 어린이, 노인을 포함해 최소 수십명을 인질로 잡아 가자지구로 끌고 간 것으로 추정됐을 뿐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인 지아드 알-나칼라는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을 언급하며 이들이 모두 풀려날 때까지 이스라엘인 인질들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가운데 이란 안보 당국자들이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공격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하마스와 헤즈볼라, 그밖에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단체 소속 익명의 고위 관계자들을 인용해 &amp;ldquo;이란은 지난 2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회의를 열고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 작전을 승인했다&amp;rdquo;며 이같이 보도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무장단체 관계자는 이란혁명수비대(IRGC) 장교들이 지난 8월부터 하마스와 협력하며 지상과 해상, 공중으로 이스라엘을 급습하는 방안을 고안해 왔다고 전했습니다. 작전 세부 사항은 여러 차례에 걸친 베이루트 회의를 거쳐 개선됐는데, 이들 회의에는 이란혁명수비대 장교는 물론 이란이 지원하는 4개 무장단체 대표가 참석했다고 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란이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직접 개입한 증거는 가지지 못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은 이날 방송 인터뷰에서 이란이 이번 공격을 지시했거나 배후에 있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지만, 이란이 오랜 기간 하마스를 지원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 또한 이란의 직접 개입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지만 이란이 이번 하마스 공격의 배후에 있음을 공공연하게 지목하고 있습니다.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는 이날 회견에서 &amp;ldquo;우리는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이란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다른 테러 군사조직 리더들과 회의한 사실을 알고 있다&amp;rdquo;며 &amp;ldquo;우리 지역의 이란의 대리인들은 이란과 최대한 협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amp;rdquo;라고 말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미국 정부는 8일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항모전단을 이동 배치하고 군 장비 등을 제공한다고 신속하게 발표했습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은 우선 제럴드 포드 항모전단의 동지중해 이동을 명령했으며 항모전단은 항공모함인 제럴드 포드함, 순양함인 노르망디함, 구축함인 토마스 허드너 함, 매미지함, 카니 함, 루스벨트함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현존하는 항모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제럴드 포드함은 전장 약 351ｍ, 선폭 약 41ｍ(비행갑판 80ｍ), 배수량 11만2t 등 초대형 규모로 비행기를 75대 이상 탑재할 수 있습니다. 또 최신형 A1B 원자로 2기를 통해 동력을 20년간 무제한 공급받을 수 있으며 전자식 사출장치, 강제 착륙 장치 등이 장착돼 있어 &amp;lsquo;슈퍼 핵 항모&amp;rsquo;로 불립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세계사</category>
      <category>미국</category>
      <category>세계사</category>
      <category>이란</category>
      <category>이스라엘</category>
      <category>이스라엘 팔레스타인</category>
      <category>이스라엘 하마스 전쟁</category>
      <category>팔레스타인</category>
      <category>하마스</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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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0 Oct 2023 01:13:59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35년만에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국회는 6일 본회의를 열어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야당 주도로 부결됐습니다. 이로써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는 35년 만에 국회에 부결로 낙마했습니다. 여야는 이날 오후 2시 국회에서 본회의를 열고 이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표결에 나서 재석 295명 중 찬성 118명, 반대 175명, 기권 2명으로 부결했습니다. 이는 168석의 더불어민주당, 6석의 정의당 등 야권이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고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을 당론으로 채택하면서 야권 주도로 부결한 것으로 보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해야 하는 직책은 국무총리, 대법원장, 대법관, 감사원장, 헌법재판소장 입니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가결을 위한 정족수는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 찬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민주당 주도로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서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이후 35년만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사례로 남게 됐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앞서 민주당은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 표결 전에 당론으로 부결을 채택했습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서 &amp;ldquo;부결 시 사법부 공백이 우려된다는 정부 여당의 여론몰이에 유감을 표한다&amp;rdquo;며 &amp;ldquo;국회가 인사 청문제도와 임명 동의제도를 통해 부적격 인사를 걸러내도록 하는 삼권분립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amp;rdquo;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amp;ldquo;사법부 공백 우려 때문에 자격 없는 인사를 사법부 수장에 앉히도록 하는 것은 사법 불신이라는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온다&amp;rdquo;며 &amp;ldquo;대통령과 여당이 할 일은 국회와 야당에 대한 부당한 압박이 아닌 실패한 인사 검증에 대한 사과와 부적격 인사의 철회&amp;rdquo;라고 지적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 대책회의에서 &amp;ldquo;이번에 인준안이 부결된다면 국회 일정상 두 달 이상 공백이 불가피해지고, 그 사이 사법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amp;rdquo;며 &quot;법원 인사가 지연되고 신속하게 재판받을 국민의 권리는 크게 침해될 것&amp;rdquo;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amp;ldquo;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이 후보자에 대한 일부 논란이 있었으나 인준을 부결시킬 정도의 사유는 아니었다&amp;rdquo;며 &amp;ldquo;오히려 김명수 사법부의 각종 비정상을 바로잡고 사법부 독립과 정치적 중립을 이뤄낼 수 있는 적임자라는 게 확인됐다&amp;rdquo;라고 덧붙였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서 대법원은 현재처럼 안철상 선임대법관이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맡습니다. 최고법원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상당 부분 제한적으로 행사된다는 의미입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심리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선고는 타격이 불가피힙니다. 안 권한대행에 행정 업무가 몰리면 나머지 대법관들의 업무가 가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법관 1인이 맡는 상고심 재판 수는 연간 4000건에 달합니다. 결국 공석 사태로 인한 혼선과 파행으로 인한 피해가 국민과 국가에 돌아오게 됩니다. 여기에 대법원과 함께 양대 최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 유남석 소장 임기 종료(11월10일)까지 겹치면서 전반적인 국가 사법 체계가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정치사</category>
      <category>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category>
      <category>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category>
      <category>사법부 공백</category>
      <category>이균용</category>
      <category>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category>
      <category>정치</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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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3#entry43comment</comments>
      <pubDate>Fri, 6 Oct 2023 19:40:47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개천절의 뜻과 유래!! 개천절이 양력으로 10월 3일인 이유!!</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대한민국 5대 국경일에 해당하는 뜻깊은 날로서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고조선의 건국일은 양력 10월 3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개천절을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기념하는 걸까요?? 그리고 역사적으로 개천절이 10월 3일이 맞을까요?? 오늘은 개천절의 뜻과 유래, 그리고 개천절이 양력으로 10월 3일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2 data-ke-size=&quot;size26&quot;&gt;개천절의 뜻과 유래!! 개천절이 양력으로 10월 3일인 이유!!&lt;/h2&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개천절(開天節)은 한자로 열 개(開)의 하늘 천(天) 자를 사용하여 '하늘이 열린 날'이란 뜻으로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이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하여 역사를 개창한 것을 기념하는 날 압니다. 날짜는 10월 3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른 법정 공휴일이면서 5대 국경일이므로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고려시대 일연이 쓴 &amp;lt;삼국유사&amp;gt;에 따르면 기원전 2333년에 환웅의 아들 단군이 태백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t;삼국유사&amp;gt;의 기록에 따라 우리 민족의 최초의 국가인 단군의 고조선(단군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날로 개천절이 지정되었지만, 역사학적으로 10월 3일이 고조선의 건국일인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삼국유사의 기록되어 있더라도 고려시대에 기록이기에 고조선의 정확한 건국일자는 불명이며 일자나 월은커녕 건국 연도조차 불투명해서 학설마다 몇 백 년씩이나 차이가 납니다. 아마도 다른 청동기 시대 국가처럼 부족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음력 10월 3일 자체와 고조선 건국 사이에는 어떠한 역사학적으로 관련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한말 독립운동가 나철이 만든 대종교의 관점에서는 &quot;한배님이 갑자년 10월 3일 태백산에 강림하여 125년간 교화시대를 지내고 무진년(戊辰年) 10월 3일부터 치화(治化)를 시작했다.&quot;는 문장을 근거로 하는데,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457년(갑자)에 강림했고 기원전 2333년(무진)부터 통치화를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렇게 개천절이 역사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이유는 나철의 대종교와 전통적으로 음력 10월은 특별한 달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음력 10월은 동짓달(음력 11월) 바로 전 달로, 12간지로 따지면 마지막 해(亥)에 해당하는데 이 즈음이면 농사도 끝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느낌도 강하여 이 때는 민간에서도 상달이라 하여 집집마다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나철의 대종교 이전에 전국적으로 10월 3일을 단군이나 개천 또는 민족의 개창과 연결지어 생각한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 일부 지방에 '음력 10월 3일에 단군에게 제사 지내는 향산제라는 풍속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19세기 문헌인 무당내력에는 &quot;상원갑자 10월 3일에 신인이 박달수 아래로 내려오니 단군이라 한다. 신교(神敎)를 세우고 백성들을 가르쳤다.&quot;라는 구절이 있으며, 김염백(金廉伯)이 평안도에서 1890년대에 일으킨 단군신앙 집단에서도 음력 10월 3일을 단군의 탄생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조선 후기에 평안도나 함경도 등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단군과 음력 10월 3일을 연결 짓는 민간신앙이나 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추론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1년(1392년)의 8월 11일 2번째 기록에는 &quot;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quot;, &quot;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quot;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왕조의 제사예법에서는 상순, 즉 1일부터 10일까지는 존귀한 제사를 드리는 날, 중순은 사대부, 하순은 그 이하가 제사를 지내는 날로 삼았으며 왕실 제사 예법에도 상순에 드리도록 정한 제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옛 고대 국가들의 제천 행사도 10월에 열렸습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해 고려하면 아마도 나철은 단군과 음력 10월 3일을 연결짓던 조선 북방 지역의 민간신앙이나 기존의 고사 등 우리 민족의 전통을 참조해서 단군을 믿는 대종교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렇게 만들어진 대종교에서 1909년 처음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발표할 때 음력 10월 3일을 경절(慶節)이라고 부르며, &quot;단군 대황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참 도를 세우신 지 4237년, 광무(光武) 8년(1904)에 백두산에서 백봉(白峰)이라는 인물에게 단군교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quot;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1910년에 나철은 &quot;환인이나 환웅, 환검이라 함은 전부 단군 한 분을 나누어 불렀을 뿐&quot;이라고 하여, 단군을 적극적으로 천신(天神)과 일체화하고, 환웅이나 환인과 따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대종교의 신앙체계 안에서 단군을 천신과 일체화함으로써 음력 10월 3일에 전통적인 제천축제일의 이미지까지 덧씌웠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후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계 세력과 교류하였으며, 자체적으로 음력 10월 3일을 기념하여 경축하였습니다. 다만 그 명칭은 대종교의 명칭인 '개천절', 혹은 '개천경절'이란 단어를 피하고 '대황조성탄 및 건국기원절(大皇祖聖誕及建國紀元節)'이라고 하였고, 이 날 임시정부 국무원이 주최하는 축하식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명칭을 붙인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근대 국가에 걸맞게 단군을 천신으로 이해하는 대종교 측 인식을 피하려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기에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임시정부 출범 당시에는 요인 가운데 다른 종교 신자들도 제법 있었던 데다,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도 단군을 인간이 아닌 천신으로 이해하면 자칫 단군의 실재 여부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게 될 우려가 있었으며, 이것이 공연히 논쟁을 자초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종교의 용어인 개천절을 기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국경일 제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정권 수립으로 분단과 이념 논쟁으로 나라가 혼란하고 어수선하여 아무런 국경일을 제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듬해인 1949년에야 비로소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법률 제정을 앞두고 당시 문교부에서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할 수 있는지 검토하였습니다. 하지만 심의 결과 환산할 수 없다고 나왔거니와 '10월 3일'이라는 날짜 자체가 중요하단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1949년 10월 1일에 법률 53호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이름하여 국경일로 제정되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런데 도대체 왜 그 당시 문교부는 음력 10월 3일을 굳이 양력으로 환산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에는 태음력이 '비과학적인 역법'이라고 국제적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쓰지 말자는 것이 정부 공식 입장 이었습니다. 이 시절에는 설날 연휴도 양력 기준으로 쇠었고 심지어 추석도 양력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음력 8월 보름을 양력으로 환산하자니 도무지 답이 안 나와서 마지못해 추석에만 음력 사용을 인정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민간의 음력 사용 관행을 없앨 수는 없어서 결국 정부도 포기하고 1970년대 지정된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을 따르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 설날 연휴도 양력 기준에서 음력 기준으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대종교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했지만, 정부에서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지정하자 이를 존중하여 음력 10월 3일과 양력 10월 3일 양일을 모두 기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전산의 발달로 달력 계산이 간편해지면서, 기원전 2333년의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자는 주장도 나타났지만 이것은 실제로 적용시키기에는 기술적 문제가 있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첫 번째 문제는 태음력 자체의 문제로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된 음력은 단 한 가지의 역법이 만세불변 쓰인 것이 아니고, 청나라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 천문학 지식을 더하여 만든 시헌력을 기준으로 조정된 것입니다. 문헌자료로 상고되는 중국의 옛 역법만 보더라도 시헌력과는 또 기준이 다르고, 옛 역법으로 올라갈수록 이 차이가 커집니다. 하물며 문헌자료도 없는 기원전 2333년의, 그것도 중국이 아닌 고조선에서 사용했을 역법은 고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게다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일자 자체도 부정확한 마당에 음력 날짜도 17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시헌력을 따라 계산해야 한다면, 사실상 아무 가공의 일자를 하나 고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두 번째 문제는 기원전 수천 년 쯤 되면 산술적 역법과 천문학적 역법 사이의 오차가 너무 커져,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달력 프로그램은 거의 의미가 없고 천문대에서 해와 달의 움직임을 계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천문연구원도 음양력 변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까지로 상한을 정하였습니다. 계산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해와 달의 정확한 움직임을 계산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실제 관측결과를 바탕으로 계산을 보정하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대충 구할 수 있는 전자달력은 이런 천문학 보정을 무시하고 하루를 더하거나 빼면서 세는 것으로, 미래로 갈수록, 혹은 과거로 갈수록 천문학적 오차가 코집ㄴ. 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러한 문제점에 덧붙여 역사적으로는 정확하고 필연적인 의미가 없는 일자 때문에 공연히 인력과 비용을 지출하느니, 어차피 개천절이 반드시 음력 10월 3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없기 때문에 당시 문교부의 심의에서는 숫자 자체에 초점을 맞추자는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개천절이 양력으로 10월 3일인 이유입니다. 즉 개천절은 역사학적으로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시조와 시작을 되돌아보는 날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오늘은 개천절의 뜻과 유래, 그리고 개천절이 양력으로 10월 3일인 이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유래</category>
      <category>개천절</category>
      <category>개천절 뜻</category>
      <category>개천절 유래</category>
      <category>개천절이 양력으로 10월 3일인 이유</category>
      <category>고조선</category>
      <category>나철</category>
      <category>단군</category>
      <category>대종교</category>
      <category>삼국유사</category>
      <category>음력 10월 3일</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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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3 Oct 2023 01:48: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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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이유와 차례와 제사와의 차이!! 차례의 뜻과 유래!!</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1</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민족의 대명절인 설날과 &lt;a href=&quot;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m/3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gt;추석&lt;/span&gt;&lt;/a&gt;에 빠질 수 없는 풍습이 있습니다. 바로 차례입니다. 이 차례 때문에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야 할 명절 연휴에 가족들이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이 발생합니다. 여성 분들은 차례 음식 하시느라 황금 같은 연휴에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고 종교가 다르면 차례를 지내느니 마느니로 얼굴을 붉히며 다툽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추세가 차례를 안 지내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것이며 차례와 제사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이유와 차례와 제사와의 차이, 즉 차례의 뜻과 유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lt;h2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6&quot;&gt;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이유와 차례와 제사와의 차이!! 차례의 뜻과 유래!!&lt;/h2&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설날과 &lt;a href=&quot;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m/3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gt;추석&lt;/span&gt;&lt;/a&gt;에 대표적인 풍습인 차례를 지내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제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제사(祭祀)란 신이나 신령, 죽은 사람의 넋 등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의식을 통칭합니다. 따라서 고대 종교의 신전 제의, 가톨릭의 미사 등도 일컫는 폭넓은 개념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유교적 조상제사의 의미로 쓰입니다. 전 세계 어디에나 제사에 해당하는 조상 추모 의식은 존재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제사라 함은 유교적 제례 행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 압니다. 유교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4대 조가 넘어가면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원칙적으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이후 5대조 이상의 조상은 개개인의 기일이 아닌 음력 10월에 동시에 기리는 흔히 시제라고 하는 묘사(墓祀)를 지내거나,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신위는 시대가 지나도 옮겨 그만두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不遷位) 같은 예외가 추가되었습니다.&lt;br&gt;&amp;nbsp;&lt;br&gt;이러한 제사는 고대 중국에서부터 전해져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사는 신이나 신령, 조상 등에게 봉헌하는 의식은 유교뿐 아니라 수많은 종교에서 관찰되며 중요시됩니다. 유허비 지중해 문화권의 고대 종교들에서는 훌륭한 제사는 '경건함'의 주요한 예시였고, 동아시아에서는 갑골문에서 수많은 제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종교가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종교가 공적 영역으로 인식되던 고대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신심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제사가 자연스럽게 중시되었습니다.&lt;br&gt;&amp;nbsp;&lt;br&gt;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 바탕에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조상을 섬기는 문화에서부터 제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했지만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풍습을 따라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이것도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끔찍한 인신공양을 막기 위해 상나라 제사 문화를 재정비했습니다.&lt;br&gt;&amp;nbsp;&lt;br&gt;인신공양을 막기위한 수단으로써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의미를 갖는 종교적인 제도로 고착화되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중국 중원을 차지한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으며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으며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습니다.&lt;br&gt;&amp;nbsp;&lt;br&gt;또한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유교적 영향을 받았어도 아들이던 딸이던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습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출가외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남녀 구별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으며, 기혼 남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집간 누나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즉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 청나라한테 멸망당한 이후 성리학적 명분론에 빠져있던 양반들에 의해 되지도 않는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因習)이 나타났고 집성촌일 경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amp;nbsp;&lt;br&gt;&amp;nbsp;&lt;br&gt;이러한 제사 중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부릅니다. 간단히 말해 특별한 명절, 설날과 추석 등에 한해서는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즉, 차례는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며, 제사의 특별한 케이스가 차례 입니다. 그러니 설날이나 추석에 지나는 제사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며 딱히 틀리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제사를 차례라 부르진 않으며, 그렇게 부르는 것은 틀린 표현입니다. 이것이 차례와 제사와의 실질적인 차이입니다.&amp;nbsp;&lt;br&gt;&amp;nbsp;&lt;br&gt;일반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제사라고 하면 기제사를 가리키는데, 기제사란 죽은 사람의 기일에 그 사람만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기제사든 차례든 보통 제주 위로 돌아가신 4대 조상까지 지내는 건 마찬가지지만, 명절 등에 지내는 차례는 4대 조상까지 연달아 대접하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기제사와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차례는 언제부터 지냈을까요?? 역사적으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석이 시작된 신라에서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lt;a href=&quot;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m/3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gt;추석의 유래&lt;/span&gt;&lt;/a&gt;에서 언급했듯이 달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신앙에서 추석이 시작된 것이기에 차례는 달에 대한 제사에서 나타난 풍습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입니다.&amp;nbsp;&lt;br&gt;&amp;nbsp;&lt;br&gt;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차례는 삼국사기 제사지의 내용이나 중국의 차가 전해지고 재배한 역사를 감안하면 명절 제례로 신라시대부터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이를 토대로 원래는 차를 올리는 다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차례의 실질적인 뜻을 보면 차를 올리는 예의라는 뜻입니다. 또한 불교가 국교이던 신라, 고려시대와 차라는 부분을 고려하면, 세시풍습 및 계절제와 불교식 성향이 더해져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식 세시풍습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시 풍습도 유교식으로 변화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예법의 기본 취급받는 주자가례 중 참례와 천신례는 세시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때 초일에는 술과 차를, 그리고 보름에는 차만을 올렸습니다.&lt;br&gt;&amp;nbsp;&lt;br&gt;다만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교적 교리가 강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석회수를 마사지 못하고 아열대 기후가 있어서 차 생산과 문화가 발달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차는 엄청난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quot;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차를 올리지만, 조선은 술이죠&quot;를 외치면서 차례상에서 차를 빼고 술을 채워 넣었습니다. 이후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성향이 강해진 영향으로 보입니다.&lt;br&gt;&amp;nbsp;&lt;br&gt;이렇듯 차례는 유교에서 권장하는 종교적 전통이 아니라 토속신앙과 불교 및 유교의 문화가 섞인 전통적인 풍습입니다. 또한 차례의 뜻에서 보듯이 원래 차례는 간단한 상차림으로 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추석에 제사상을 차리듯 차례상 차리기를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양난 이후 조선 후기부터 공명첩과 족보 매매 등으로 돈을 주고 양반 신분을 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서로가 마치 오래된 양반 가문인것처럼 추석에도 제사상 차리듯 차례상을 차려 과시를 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후 1939년 조선총독부가 민족 문화 말살 통치에 일환으로 의례준칙을 만들어 1년에 31번 지내던 차례를 설날과 추석만 지내도록 간소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박정희 정부가 1969년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lt;br&gt;&amp;nbsp;&lt;br&gt;오늘은 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이유와 차례와 제사와의 차이 및 차례의 뜻과 유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차례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 풍습입니다. 절차와 형식의 얽메이는 하례허식의 차례보다는 풍성한 마음으로 지내는 차례가 더 뜻깊은 차례가 될 것입니다&amp;nbsp;&lt;br&gt;&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유래</category>
      <category>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이유</category>
      <category>제사</category>
      <category>차례</category>
      <category>차례 뜻</category>
      <category>차례 제사 차이</category>
      <category>차례를 지내는 이유</category>
      <category>차례상</category>
      <category>차례와 제사와의 차이</category>
      <category>차례의 유래</category>
      <category>추석</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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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8 Sep 2023 12:44:3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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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회 헌정사상 초유의 야당 대표 이재명 체포동의안과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가결!!</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0</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21일 국회 본회의장에선 대한민국 75년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세 번 연속 일어났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제1야당 대표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이 이날 하루 한꺼번에 가결됐습니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이날 오후 2시 시작된 본회의에선 &amp;lsquo;교권 회복 4 법&amp;rsquo; 등 여야 이견이 없는 안건을 먼저 처리한 뒤 핵심 안건을 잇따라 상정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가장 먼저 표결에 부쳐진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은 표결에 참여한 295명 중 찬성 175명, 반대 116명, 기권 4명으로 가결했습니다. 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 의원들이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풀이됩니다. 지난 18일 민주당이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을 제출한 뒤 국민의힘은 &amp;ldquo;야당의 국정 발목 잡기&amp;rdquo;라며 반발해 왔지만 송기헌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해임건의안 제안 설명에서 &amp;ldquo;총리 해임건의안 처리가 무능력 해체의 시작이 될 것&amp;rdquo;이라며 찬성을 독려했습니다. 국회에서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건 이번이 헌정사상 처음입니다. 제헌국회 이래 총 9건의 총리 해임건의안이 발의됐지만 그동안 가결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본회의 통과 직후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amp;ldquo;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을 물타기 하기 위해 해임건의안을 도구로 삼는 민주당을 과연 대한민국의 공당(公黨)이라고 할 수 있느냐&amp;rdquo;며 &amp;ldquo;사법 리스크에 빠진 제1야당 대표가 초래한 희대의 비극이자 헌정사의 오점&amp;rdquo;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회가 자신을 해임건의한 직후 약 10분간 총리실 간부들과 티타임을 갖고 &amp;ldquo;지금과 같이 업무에 임해달라&amp;rdquo;고 당부한 뒤 평상시처럼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해 온 대통령실도 이날 공식 입장 없이 &amp;ldquo;종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은 입장&amp;rdquo;이라고 밝혔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후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쌍방울 대북송금과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습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은 무기명 투표 결과, 출석 295명 중 가결 149명, 부결 136명, 기권 6명,무효 4명으로 가결됐습니다.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은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 찬성으로 의결되는데, 가결을 위한 최소 투표수 148표보다 찬성표가 1표 더 나왔습니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2월 27일 첫 번째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이후, 이번에도 공개적으로 부결을 요청했으나 결국 가결을 피하지 못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더불어민주당 이소영 원내대변인은 표결이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quot;예상하지 못한 결과라서 많이 놀랍고 충격적이다. 지도부가 의원들에게 여러 차례 부결을 호소했는데 다른 결과가 나와서 안타깝게 생각한다&quot;며 &quot;긴급하게 모여서 상황과 대책을 논의하고 추후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quot;라고 밝혔습니다. 민주당 지도부는 본회의장에서 나와 긴급 비공개 최고위원회를 열고 후속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이어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향후 대응 방안 등에 대한 의견을 모았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뒤 기자들과 만나 &quot;누구도 민심을 이길 수 없다. 민심을 반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quot;고 말했습니다. 이어 &quot;마지막 정기국회에서 민주당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 민생의 시간으로 21대 국회를 만들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quot;며 &quot;민주당도 오늘 상황으로 혼란스럽긴 하겠지만 공당으로서 민생을 책임지는 책임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줄 것으로 기대한다&quot;라고 밝혔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표결이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quot;이 시스템은 일반 국민들과 똑같이 법원의 심사를 받으라는 시스템&quot;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정치사</category>
      <category>국무총리 해임건의안 가결</category>
      <category>이재명</category>
      <category>이재명 체포동의안</category>
      <category>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category>
      <category>한덕수</category>
      <category>한덕수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가결</category>
      <category>헌정사상 최초</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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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40#entry40comment</comments>
      <pubDate>Fri, 22 Sep 2023 01:18: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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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추석의 유래와 뜻!! 추석의 역사!!</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39</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quot;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quot;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추석은 우리 선조들도 중요시하는 민족의 큰 명절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면서 오늘날에도 최소 3일에 휴일을 보장하는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북한이 모두 기념하는 몇 안 되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을 기념했을까요?? 그리고 추석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은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의 유래와 뜻, 그리고 추석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amp;nbsp;&lt;br&gt;&amp;nbsp;&lt;/p&gt;&lt;h2 style=&quot;text-align: left;&quot; data-ke-size=&quot;size26&quot;&gt;추석의 유래와 뜻!! 추석의 역사!!&lt;/h2&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추석(秋夕) 또는 한가위는 첫 수확을 하고 본격적인 수확을 앞둔 이전에 첫 수확에 감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한민족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명절입니다. 날짜는 매년 음력 8월 15일로, 우리나라에서는 추석 하루 전과 다음 날을 포함한 '추석 연휴'는 '설날 연휴'와 함께&amp;nbsp;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른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디다. 이러한 추석은 전통적으로 한민족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이었으며,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설날과 더불어 가장 큰 명절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추석 즈음에는 대부분의 곡식이나 과일들이 익지 않은 상태로 본격적인 추수를 하기 전, 즉 한 해 농사의 중요 고비를 넘겼을 때 미리 곡식을 걷어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며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 추석의 본 의미입니다. 힘들고 바쁜 여름 농사일은 이미 끝냈고, 가을 추수라는 큰 일을 앞두고 날씨도 적절하니 벌초도 할 겸 성묘도 하고 놀면서 즐기는 명절이었습니다.&lt;br&gt;&amp;nbsp;&lt;br&gt;그러나 추석의 유래를 살펴보면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추석의 유래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자료와 문헌은 없습니다. 즉 추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제부터 기념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유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시대적 배경과 추석에 대한 기록들을 보고 추석의 유래를 추론하면 신석기시대부터 있어왔던 달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신앙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지금과 달리 고대 사회에서는 동물이나 자연물을 믿는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같은 원시적인 토속신앙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특히 태양이 있는 낮에 비해 밤은 어둡고 춥기 때문에 맹수들에게 손쉽게 사냥당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한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드는건 당연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나 공포감을 해소시키는 것이 바로 밝은 달이었고 태양과 달라 달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기에 달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달 중에서도 완전하고 가장 밝은 달인 보름달을 가장 신성시했을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밝은 보름달이 뜨는 보름은 전기도 없는 고대 사람들에게는 안정감과 위안이 주기엔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매월 보름달이 뜨는 음력 15일, 즉 보름에는 보름달이 뜨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나 축제를 벌였고 그중에서도 일 년 중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이 뜨는 음력 8월 15일에 큰 축제를 벌여 명절로 삼게 되었다는 설입니다.&lt;br&gt;&amp;nbsp;&lt;br&gt;또한 음력 8월 15일을 지나면 곡식이나 과일들이 무르익어 먹을 것이 풍족해지는 시기가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음력 8월 15일에 뜨는 보름달을 신성시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추석의 유래가 달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신앙에서 유래되었다는 추론은 추석의 뜻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추석은 가배, 가배일, 가위, 한가위, 중추, 중추절, 중추가절 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립니다. '가위'나 '한가위'는 순우리말로 '한'은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가위'는 가운데를 의미하므로 글자 그대로 풀어 보면 한가위는 가운데가 크다는 뜻이며, '가배'는 가위를 한자로 표현한 말입니다. 또한 추석은 가을 추(秋) 자의 저녁 석(夕) 자를 사용하여 한자를 직역하면 가을 저녁이라는 뜻입니다.&amp;nbsp;&lt;br&gt;&amp;nbsp;&lt;br&gt;이렇게만 보면 추석이 달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신앙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름은 대부분 명절이었으며 추석 또한 중추(中秋)와 월석(月夕)을 합친 말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계절을 초,중,종으로 나눴는데 추석은 보통 24 절기 중 가을의 두 번째 절기인 처서와 네 번째 절기인 백로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석 때는 가을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 보름달이 뜨는 보름 저녁은 한번 있습니다. 즉 이러한 배경에서 추석의 뜻을 해석하면 완전한 가을에 보름달이 뜨는 저녁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의 기원은 유교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禮記)에 기록된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은 '봄에는 아침 햇살이 좋고, 가을에는 저녁 달빛이 좋다'란 뜻입니다.&lt;br&gt;&amp;nbsp;&lt;br&gt;또한 문헌 상에서도 추석이 보름달과 관련이 있다고 보이는데, 추석의 유래에 대한 최초의 사료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이를 인용하여 조선 성종 때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3대 왕 유리 이사금 때 서라벌 도성(6부) 안의 부녀자를 두 파로 나누고 두 명의 공주로 하여금 각 파를 이끌게 하여 백중(음력 7월 15일) 다음 날부터 한 달 동안 삼을 삼아 옷감인 무명천을 짜게 하여 음력 8월 15일, 즉 추석 당일에 한 달간의 짠 무명천의 길이를 재서 성적을 심사해진 편이 이긴 편에 한턱 내고 모두 노래와 춤을 즐기며 놀도록 한 가배에서 유래를 찾습니다.&lt;br&gt;&amp;nbsp;&lt;br&gt;즉 추석의 유래가 '가배(嘉俳)'라는 이름으로 1세기까지 기원이 거슬러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신라 이전에&amp;nbsp; 국가에서도 이런 문화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라 이전에 국가인 삼한에서도 이란 문화인 오월제와 시월제가 있었습니다. 오월제와 시월제는 삼한의 제천행사로 음력 5월과 10월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오월제와 시월제가 역사적으로 명확히 추석에 영향을 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마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어두식 표현인 &quot;가배&quot;라는 이름은 현재까지도 가윗날, 한가위 등에서의 &quot;가위&quot;로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신 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속지금행지(國俗至今行之)', 즉 추석의 길쌈놀이가 당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주에서는 '두레길쌈'이라는 제도가 실제로 조선 초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이후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식 중추절의 영향 또한 많이 받았습니다.&lt;br&gt;&amp;nbsp;&lt;br&gt;다만 추석의 유래와 관련해서 다른 사료도 있습니다. 고대 일본의 승려 엔닌이 저술한 &amp;lt;입당구법순례행기&amp;gt; 중 839년 8월 15일 기록을 보면 당시 신라인들이 즐겼던 추석 풍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당 문헌에 따르면 추석은 신라가 고구려와 싸워 승리를 거둔 날을 명절로 삼은 것에서 유래했으며, 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3일 밤낮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칭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라 공표한 고려에서도 추석을 4대 명절로 삼아 중시했던 것을 보면 위의 사료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볼수 있겠습니다.&amp;nbsp;&lt;br&gt;&amp;nbsp;&lt;br&gt;어찌 되었든 중국 역사서에서도 음력 8월 15일에 신라의 왕이 큰 축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추석은 최소한 신라에서부터 명절로 삼았다는 추측입니다. 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추석이 펴졌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민족 최대의 명절로 자리 잡았습니다.&amp;nbsp;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국가 행사 중 하나였습니다. 1438년에는 추석 날에 사형 집행이 금지되었으며, 1531년에는 병을 핑계로 추석제에 나오지 않은 벼슬아치들이 파직되기도 했을 정도로 상당히 귀중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497년에는 추석 제사 도중 발을 헛디뎌 독을 깨뜨린 관리가 의금부에 하옥되어 죄를 신문받기도 하였습니다.&lt;br&gt;&amp;nbsp;&lt;br&gt;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사실상 폐지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부활했습니다. 첫 공휴일로 지정된 1949년에는 추석 당일만 휴일이었다가, 1986년에 추석 다음 날(음력 8월 16일)이 공휴일에 포함되었고 1989년부터 추석 전날(음력 8월 14일)까지 휴일로 지정되면서 3일 연휴가 만들어졌습니다. 추석이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지정되어서 월요일과 금요일에 휴직하여 황금연휴가 된 사례도 있으며, 여기에 2013년 대체 휴일 제도 시행령에 따라 3일 연휴 중 하루라도 일요일 또는 공휴일과 겹칠 경우 공식 연휴 다음 날인 음력 8월 17일을 대체 휴일로 쉬게 되었고 2014년 추석 전날인 9월 7일이 일요일과 겹치면서 추석 다음다음 날인 9월 10일이 수요일이 첫 대체 휴일로 지정되었다. 2015년에도 추석 당일이 일요일이라 음력 8월 17일까지 휴일이 되었습니다.&lt;br&gt;&amp;nbsp;&lt;br&gt;이렇듯 추석은 삼국시대 신라에서부터 지켜온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명절입니다. 비록 고대 달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신앙에서 유래되었다는 가능성이 높지만 여러 시대와 역사를 거쳐 오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문화로 발전해왔습니다. 오늘은 추석의 유래와 뜻, 그리고 추석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정확한 추석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추석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민족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통이 이어지면서 오늘날에도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추석 하면 떠오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명절 하면 떠오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풍습인 &lt;a href=&quot;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m/41&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gt;차례&lt;/span&gt;&lt;/a&gt;입니다. 다음 포스팅은 &lt;a href=&quot;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m/41&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gt;차례의 유래&lt;/span&gt;&lt;/a&gt;로 찾아뵙겠습니다.&amp;nbsp;&lt;/p&gt;</description>
      <category>유래</category>
      <category>가배</category>
      <category>민족의 최대 명절</category>
      <category>삼국사기</category>
      <category>신라</category>
      <category>중추절</category>
      <category>추석</category>
      <category>추석 뜻</category>
      <category>추석의 유래</category>
      <category>한가위</category>
      <category>한가위 뜻</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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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2 Sep 2023 00:00: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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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우상혁 대한민국 육상선수 최초 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 우승!!</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38</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대한민국 남자 높이뛰기 간판이자 이른바 스마일 점퍼로 불리는 우상혁(27&amp;middot;용인시청)이 대한민국 육상선수 최초로 세계육상연맹이 주최하는 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우상혁은 17일(한국시간) 미국 오리건주 유진 헤이워드 필드에서 열린 2023 세계육상연맹 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 남자 높이뛰기 경기에서 2ｍ 35cm를 넘어 정상에 올랐습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우상혁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날 2ｍ 29cm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바를 넘은 선수는 우상혁과 주본 해리슨(미국) 두 명뿐이었습니다. 우상혁은 2ｍ 33cm마저 1차 시기에 넘으면서 단독 선두로 나섰습니다. 2ｍ 25cm와 2ｍ 29cm에서 한 번씩 실패한 노베르트 코비엘스키(폴란드)도 2ｍ 33은 1차 시기에 성공했습니다. 해리슨은 3차 시기에 2ｍ 33cm을 넘으며 우상혁을 압박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코비엘스키가 2위, 해리슨은 3위로 마쳤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일찌감치 내년 파리 올림픽 출전 기준 기록인 2m 33cm을 통과한 것도 소득입니다. 우상혁은 &quot;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 우승은 내 인생 목표 중 하나였다&quot;며 &amp;ldquo;정말 기쁘고 감격스럽다. 응원해 주신 모든 분, 나를 일으켜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 아시안게임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것이고 파리 올림픽 우승을 향한 노력도 이어가겠다&amp;rdquo;라고 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상혁은 시즌 초 발뒤꿈치 통증과 부비동염 수술 등으로 고전했습니다. 지난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에서는&amp;nbsp; 컨디션 난조로 6위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이 올림픽, 세계선수권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에 한국 선수 최초로 나가 우승까지 내달렸습니다. 다이아몬드리그는 1년에 총 14개 대회를 치르며 13개 대회에서 쌓은 랭킹 포인트로 순위를 정해 14번째 파이널 무대에서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하지만 이번 대회에는 현역 최강자인 카타르의 바르심과 올 8월 부다페스트 세계육상선수권의 우승자인 이탈리아의 장마르코 탬베리가 불참하게 되면서 의미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2021년 도쿄 올림픽(4위)과 지난해 세계선수권(2위)에서 작성한 2m 35cm를 넘으면서 자신감을 키운 우상혁은 10월 4일 결선이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바르심과 진검 승부를 예고했습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스포츠사</category>
      <category>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category>
      <category>다이아몬드리그</category>
      <category>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category>
      <category>다이아몬드리그 파이널 우승</category>
      <category>대한민국 육상 최초</category>
      <category>우상혁</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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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7 Sep 2023 17:35: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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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title>
      <link>https://historyquestlife.tistory.com/37</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오늘은 9월 15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린 세기의 작전이 펼쳐진 날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6.25 전쟁의 전세를 한 번에 뒤집어 버리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단숨에 수도인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대대적인 반격작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듯 인천상륙작전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명운을 쥔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고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h2 data-ke-size=&quot;size26&quot;&gt;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lt;/h2&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전격적인 대한민국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후 전쟁 초반 북한 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했습니다. 이에 단 3일 만에 수도인 서울을 함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으로 도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요코하마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6월 29일 도착해 김홍일 장군의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본격적으로 참전을 결정한 후 &amp;ldquo;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amp;rdquo;는 구상을 하였고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7월 22일 미제 1기 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RCT)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 (Operation Bluehearts)이 만들어졌으나 전황이 악화되고 미 본토에서의 상륙부대 배치가 늦어지면서 취소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전략은 이른바 폭풍 작전으로 인민군이 유엔군과 국군을 밀어붙인 후, 좌우 양 측면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위아래를 보자기로 감싸듯이 섬멸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6.25 전쟁 초반부터 8월 초까지 먹혀들어 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그만큼 인민군은 더욱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전투, 김종오 장군의 춘천 전투, 손원일 제독의 대한해협 해전 등에서 인민군을 지연시키면서 폭풍 작전은 사실상 실패합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초가 되자 유엔군과 국군은 더 이상 밀릴 땅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나다가는 동해와 남해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습니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낙동강 전선, 일명 부산 교두보 전투의 시작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북쪽과 서쪽의 2면만 방어하게 되자 더 이상 인민군에게 양측면을 노출시키지 않게 되자 인민군은 이제까지 재미를 봤던 포위, 섬멸 작전을 아예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엔군은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하여 병력과 무기, 전쟁물자를 빠르게 보급받게 되면서 인민군이 6.25 전쟁 초기에 누렸던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위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던 중 8월 말이 되었습니다. 단기전을 예상하여 최소한의 전쟹물자만으로 침공한 인민군은 이미 대다수의 부대가 커다란 병력 손실을 입어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으며 보급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식량, 무기,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병력을 대신하여 투입된 병력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민군은 9월 공세를 준비합니다. 1950년 9월 1일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최후의 공세인 낙동강 대공세를 감행했습니다. 인민군은 아직까지는 병력과 무기 측면에서 유엔군과 국군을 거의 압도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인민군은 5개의 공격축을 구축하였는데 우선 동쪽인 경주를 공격했고, 대구와 가산을 포위했으며, 낙동강을 다시 도하하여 영산을 향해 진격했고, 남강과 함안을 통해 마산을 점령하고자 하는 6.25 전쟁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폭풍 작전의 실패로 전쟁물자를 빠르게 소진한 인민군은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태였고 결국 결과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였습니다. 즉 유엔군과 국군은 인민군의 파상공세를 강인한 애국심과 효과적인 방어로 막아냈으며 두 번에 걸친 파상공세의 실패로 인민군은 병력과 자원이 급감하게 되었고, 공세 위주의 전략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북한군은 공세의 실패로 인해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도 버겁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맥아더 장군은 7월 22일에 연기됐던 미제 1기 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이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을 다시 재추진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인천이 아니라 전라북도 군산시였습니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북한군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천의 자연적으로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인천은 자연적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해안 절벽과 썰물 때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어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지형을 가진 지역입니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 제독은 &quot;성공률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quot;라고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끈질기게 인천에 상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면서 8월 28일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이 미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에 맥아더 장군은 인천에서 치를 예정인 전투와, 인천까지 상륙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손원일 제독에게 획득하라 지시했고 8월 17일 해군 첩보부대가 인천에 삽입하는 이른바 X-ray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해군 첩보대는 인천에 잠입해 장비들과 병력들의 배치,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 정보를 수집했고,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했습니다. 그러나 9월 14일, 해군 첩보부대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었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허여 그들이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첩보대는 무사히 퇴출할 수 있었습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게 생포될 경우 고문으로 인해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했습니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했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amp;middot;11번 함 PKG-722&amp;middot;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 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상륙작전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일부러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습니다. 즉 인민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을 했었는데 양동작전이 펼쳐진 곳으로 남한 지역에는 삼척시, 군산시, 북한 지역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마량도, 남포시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 인천상륙작전만 봐도 인천에 상륙한다고 해서 D-day(9월 15일)에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한 번에 공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졌는데 교란 및 기만작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습니다.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월미도를 비롯해서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뿐만 아니라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하여 포격을 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북한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UN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수긍했습니다. 중국 측에서는 서해안의 남포, 인천, 군산과 동해안의 원산 모두 후보지로 예상했습니다. 또한 미군이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예측하다 보니 정확히 한 군데를 찍어 집중적인 방어를 펼치기가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설령 한 곳만 주공이고 나머지가 조공이라고 해도 모두 다 대비해야 하는 데다가 어느 한 곳이 제대로 뚫리면 그쪽으로 주공이 전환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물론 그 가운데도 린뱌오와 같은 전략가들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유력하다고 정확한 예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동의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quot;인천을 조심하라&quot;라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조선인민군 해군과 조선인민군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나름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에게서 노획한 물자들을 부평에 집중시켜서 상륙작전 같은 상황이 닥치면 근방에 예비병력을 집중시킨 후에 물자를 나누어주고 무장시켜서 방어작전을 수행하려고도 했습니다. 덕분에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과 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 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 육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하여 기껏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날려먹는 삽질을 해버립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낙동강 전투에 투입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김일성의 전략은 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인천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전보가 올라오면서 최악의 삽질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한반도에 파견한 공군도 소련군 소속이란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위장했습니다. 스탈린이 돕기로 마음먹는다 해도 어차피 상륙 하루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인천의 북한군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한편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 고베에서 출항한 병력은 포인트 아이오와와 사세보에서 출항한 함대와 합류하고 이후 포인트 아칸시소에서 부산에 출항한 함대와 합류 후 9월 14일 포인트 캘리포니아를 지나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습니다. 당시 규모는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으로 미국 225척, 대한민국 1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입니다. 그리고 9월 15일 0시 50분, 미군과 한국군, KLO의 연합 특공대가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 등대를 무혈로 점령하고 등대를 점등시켜 상륙부대의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으로 로켓을 퍼부었으며,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하고 USS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지휘부는 상륙시간(L-아워)을 06시 30분으로 확정하ㅂ니다. 미 해병대의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 대원들은 06시까지 여러 척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타고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했습니다.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06시 33분이었으며 미 해군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전투기들이 불과 45M 전방을 기관총 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합니다.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추가로 2개 중대를 싣고 상륙했으며 북한군의 저항으로는 산발적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G중대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지했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습니다. 그곳에서도 북한군의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다.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됩니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의 산업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과 연결된 방파제를 차단하였으며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미 해병대 전차소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약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합니다. 투항하지 않고 동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미 해병들이 대동한 M4 A3 셔먼 불도저 2대에 그대로 생매장당했습니다. 미 해병들이 월미도를 휩쓸고 다니며 소탕작전을 계속했고, 08시 미 해병대는 무선으로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 후 10시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합니다. 이곳은 조선인민군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곧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쯤 소월미도의 점령이 완료됩니다. 이때까지 사상자는 미군은 부상자 17명이 전부인 반면, 북한군은 사망자 108명에 부상자가 137명이었으며 월미도 곳곳에 널려있던 동굴째로 생매장당한 100 ~150여 명을 더하면 사상자 수는 더 많을 것입니다. 이후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합니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17 연대와 해병 제1 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 타고 레드 비치인 인천항으로 돌격했습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레드 비치의 상륙한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를 형성했습니다. 여기 탑승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측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측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고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기에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습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북한군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습니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곧바로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고, 일부 병력은 해안 경비를 맡으며 후속 상륙 병력을 도왔습니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 갔습니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미군은 인천항의 독을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일사천리로 소탕해 나갔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리고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습니다. 이어서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상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총지휘는 미 육군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병력의 총지휘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 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렇게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6.25 전쟁의 전세를 한번에 뒤집어 버리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단숨에 수도인 서울을 수복하고 9월 20일 무렵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한반도 내부의 육상교통의 중심 겸 집결지인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험산준령 지형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전쟁이라도 최전선 전투부대의 보급선을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또한 설상가상으로 애초부터 북한군의 보급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해 기존에 있던 철도 수송도 낮에는 열차가 터널 같은데 숨었다가 밤에만 살짝 이루어지고 철도가 파괴되었거나 복구 중인 구간은 보급품을 소와 말, 사람 등에 지우고 운반하던 실정에서 보급로 자체를 애초부터 산악지형이라 철도도 없고 도로도 빈약한 동쪽으로 돌릴 수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그나마 쓸만한 인원이고 우마고 죄다 낙동강 전선에 들이 붓 듯이 동원한 상태라 보급쪽에 추가로 동원할 능력이 크게 부족하며 이런 모든 문제를 무시하고 억지로 보급을 한다 해도 아주 잠깐도 버티지 못합니다. 우마차와 인력으로 사단급 병력의 보급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세계대전에서 증명된 사실이었습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을 들은 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들은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북한군 중 12,000여 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10,000여 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병력이 없는 후방은 방어선을 구축할 틈도 없이 뒤로 쭉쭉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단숨에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렇듯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버렸습니다. 더는 후퇴할 수 없던 궁지에 몰린 대한민국이 이 작전으로 역전의 카운터를 때려 전황을 북한군 우세에서 국군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반격의 신호탄을 울렸으며 이후 북한군은 종전 때까지 예전 같은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38선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 가능한 교통수단은 모두 서울을 거쳐갔고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38선 이남의 인민군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의 한국군과 유엔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남의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오히려 한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게 되면서 많은 군사학자들도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그러나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되는데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서 원산 지역의 바다에 대규모의 소련제 기뢰밭이 깔린 것에 직면하여 기뢰제거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한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합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오늘은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물론 인천상륙작전의 후속 전략은 분명히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구한 세기의 명작전입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한국사</category>
      <category>6.25전쟁</category>
      <category>김일성</category>
      <category>낙동강 전선</category>
      <category>맥아더 장군</category>
      <category>손원일 제독</category>
      <category>인천상륙작전</category>
      <category>인천상륙작전의 과정</category>
      <category>한국사</category>
      <author>역탐생</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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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5 Sep 2023 02:01: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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