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8. 00:33ㆍ한국사
꽃피는 5월, 40여 년 전 오늘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시민들이 항거했습니다. 바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항거한 사건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광주 시민분들만 신군부에 저항했는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진짜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10.26 사태와 서울의 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진짜 이유를 알아보려면 당시 시대적 상황부터 알아야 합니다. 1980년 봄,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향한 뜻을 품은 국민들과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 사이의 대립과 긴장으로 가득 찼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약 16년간 대통령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믿었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10.26 사태 라고 합니다. 또한 1979년 10월 27일 부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됩니다. 이 사건으로 1972년부터 계속되던 유신체제가 종식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당시 국무총리이자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 일단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차례차례 현실화될 것으로 국민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공범 혐의로 구속하고 군사권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방학이 시작된 직후였던 터라 개학이 될 때까지 대학가의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개학을 맞이한 1980년 3월에야 시위가 본격화되었습니다.
3월 개강과 함께 학생들은 민주화 시위 구호와 함께 '어용 교수 퇴진'을 외쳤습니다. 어용 교수란 정부의 잘 보이려 학자의 양심을 저버린 교수를 말합니다. 어용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난 대학은 서울대를 포함하여 3월 말까지 모두 18개교였으며, 참가자만 8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에 김옥길 문교부 장관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이익을 위해 허용한 사람이 있다"라고 지적하며, 이와 같은 교수들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물러나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스스로 물러난 교수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4월 9일에 성균관대학교에서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일어납니다.
유신정권 시절부터 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가 열흘간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유신체제가 종식되어 민주화 바람이 불자 학생들은 당연히 이 불합리한 훈련이 폐지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군부가 훈련을 강행하려고 하니 학생들은 반발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요구하는 농성과 시위가 다음 입소 차례였던 서울대와 서강대 등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런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신군부는 '불순분자들의 책동' 소위 좌경화된 학생들로 몰아갔고,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만나 학생들의 자제를 부탁하고 노력해 주길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사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학생 시위가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일어났다고 허위로 주장을 하며 북한 남침설 위협까지 유포시켰습니다.
이에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병영 훈련 거부 투쟁을 전두환 신군부가 정치 개입 명분으로 삼을까 우려해 이를 취소했습니다. 그 대신 '계엄령 즉각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현확 국무총리 사퇴' '정부 주도 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 등을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계엄령 즉각 해재가 등장하는지 의아하실 겁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직후에 발동된 비상계엄이 그때까지도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5월 2일 서울대 학생 10,000명이 이날부터 13일까지를 민주화 투쟁 기간으로 정하고 교내 시위와 밤샘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대학생들의 시위는 단순 학교 문제에서 정치 문제에 대한 시국 성토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5월 12일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만 조용히 시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학교 밖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시작했습니다. 5월 7일 한국외대 학생 800명이 가두시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5월 13일 연세대 주도로 서울 시내 6개 대학교 학생 2,500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고, 고려대 등 7개 대학이 밤샘 농성에 들어갔으며 5월 14일에는 서울의 27개 대학교 총학생회 대표들이 전면적 가두시위를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이날 낮 12시부터 학생 70,000명이 일제히 화신백화점 앞, 남대문, 서울역, 광화문 등 서울 중심가를 메우면서 밤 10시 넘어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김종환 내무부 장관은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경찰만으로 서울 시내의 학생 시위에 대처할 수 없다. 군이 주요 시설의 경계 임무를 맡아달라"며 군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시위는 다음날인 5월 15일에 절정을 이뤘습니다. 이날 오후 2시, 서울역 앞 광장과 도로에는 서울 35개 대학교 학생 100,000명이 모여 3일째 시위하고 있었고 도중에 경찰 가스차 3대가 불탔습니다. 그러나 이때 버스 1대가 진압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저녁 7시 50분 신현확 총리는 특별담화를 통해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에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도 즉시 해제할 테니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과 자제해 달라" 당부했고 유혈사태를 우려한 총학생회장들이 해산시키면서 시위가 끝났습니다.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고 합니다.
시위를 마친 서울대 등 서울 23개 대학교와 24개 지방대 총학생회장들은 밤 12시 고려대에서 회의했습니다. 이때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을 중심으로 일단 가두시위를 중단시켜 정상 수업에 들어가고 추후 계엄이 해재가 되지 않는다면 5월 18일에 다시 모이기로 결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5월 16일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 대부분 도시에서는 정상 수업이 이뤄졌으나,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의 대학생 2만 명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 성토 대회를 열고 밤에는 평화로운 횃불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을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며, 이 용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봄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이어졌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8년 만에 봄을 끝내버리고 맙니다.
2.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진짜 이유!!
5월 16일 오전 9시 30분 당시 야권의 핵심축인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비상계엄 즉시 해제' '정부 주도 개헌 포기' '연내 정치 일정 확정' 등 6개 항의 요구 사항을 공동 발표했습니다. 이와 별개로 국민연합은 "요구 사항에 대해 5월 19일까지 정부가 답변하지 않으면 22일부터 전국적으로 민주화 촉진 국민 대회를 여는 등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고 이화여대로 옮긴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장들도 국민연합 선언에 따를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5월 7일 이전에 전두환은 대학생들의 시위가 치열해지자,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시국 수습 방안」을 만들라"라고 지시하고 이어 5월 10일경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에게 "소요 배후 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자들을 검거하도록 준비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학봉은 5월 16일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회의를 열고 5월 17일 밤 12시부터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 시위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들을 일제히 검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한편 최규하 대통령은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중동 순방을 일찍 마치고 귀국한 상황이었습니다. 5월 17일 신군부는 회의를 열고 소요사태 수습방안을 최규하 대통령한테 보고하기로 합니다. 오후 4시 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신현확 국무총리를 찾아갔습니다. 이 자리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방안과 비상기구를 설치, 국회를 해산하는 내용의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했다. 이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은 반대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여부는 대통령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이유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오후 5시 10분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국무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서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 받고 결국 저녁 7시 계엄 확대만을 수용하고 신현확 총리에게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육군본부를 동원해 저녁 7시 35분 중앙청 외곽에 수경사 30단 소속 군인 342명이,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2층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에는 수경사 헌병단 소속 군인 253명이 약 1m 간격으로 배치돼 강압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밤 9시 42분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참석한 가운데 신현확 총리 주재로 제42회 임시국무회의가 개최됐고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하에 있다고 판단된다"며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제출한 계엄 확대 선포 안을 찬반 토론도 없이 8분 만에 의결했습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밤 11시 40분 정부 대변인인 문공부 장관이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 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회는 해산됐고 모든 정치적 활동과 시위가 금지되었습니다. 육본은 5월 18일 새벽 2시 30분 전국 92개 주요 대학과 국회 등 136개 주요 보안 목표에 계엄군 25,000여 명을 배치했습니다. 서울은 수경사 작전 통제하에 1 공수여단을 연세대·명지대에, 5 공수여단을 고려대에, 11 공수여단을 동국대에, 13 공수여단을 성균관대·서울의대에, 20사단을 서강대·홍익대·단국대·산업대·한양대·건국대·경희대·국민대에 각각 배치했고, 수도군단 작전 통제하에는 9 공수여단을 서울대에, 1 야포단을 중앙대·숭전대에 각 배치했습니다. 부산·경남은 제2군관구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9사단과 해병 1개 연대를 부산대·동아대 등 12개 대학에, 대구·경북은 제5군관구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6·50사단과 해병 1사단을 경북대·영남대 등 9개 대학에 배치했습니다. 충남북 지역은 제3군관구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2·37사단과 7 공수여단 2개 대대를 대전대·충남대 등 8개 대학에 배치했습니다. 전남북 지역은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1·35사단과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 등 30개 대학에 배치했습니다. 경기도는 33사단 등을 인하대 등 4개 대학에, 강원도는 1 군수지원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강원대 등 11개 대학에 각각 배치했습니다.
또한 김대중과 김종필, 김영삼 등 야권 인사들을 체포 및 연금시키고 총학생회 임원들도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일명 5.17 쿠데타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 조치이므로 쿠데타 입니다. 그리고 이 쿠데타에 반발하여 1백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교문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는 후속 조치가 없을 시 18일에 다시 모이기로 결의한 것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곧 학생들은 교문 근처의 용봉교(龍鳳橋)를 사이에 두고 군인들과 대치하였습니다. 이후 학생의 수가 2 ~ 3백여 명으로 늘고 항의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자 장교 하나가 나와 학생 한 명을 붙잡아 마구 구타했습니다. 이를 본 학생들은 이 구타 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폐하라" 등지의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의 시위를 하고 이에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이 분개하여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합니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으며, 심지어는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에게도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고,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무자비하게 폭행당했습니다.
이렇게 43년 전 오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사회적 불의를 타파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43년 전 전두환 신군부는 5.17 쿠데타라는 사회적 불의를 저질렀고 광주 시민들은 이를 타파하고자 항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진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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