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열사의 삶과 6월 민주항쟁

이한열 열사의 삶과 6월 민주항쟁

2023. 6. 10. 16:53한국사

우리 민족에게는 6월은 큰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달입니다. 그중에서도 6월 10일은 우리 민족의 자유를 위해 두 번이나 항거한 뜻깊은 날입니다.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일인 6월 6일 10일,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되찾기 위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후 61년 뒤인 1987년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독재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자유를 위해 항거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하루 전인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한 청년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이한열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한열 열사의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삶과 6월 민주항쟁

 

이한열 열사는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비록 넷째였지만 누나 3명이 태어난 다음 태어난 이한열 열사는 집안의 장남이라서 누구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광주에서 광주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1985년 광주진흥고를 졸업했습니다.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만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에 있었는데 당시 모범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이한열은 나중에서야 진상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고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던 중 1986년 재수 끝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경영학과 C반에 배정되었으며 최루탄 피격 당시 입고 있던 티셔츠도 C반 반티였고,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자주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한열 열사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때 대한민국 사회는 엄혹 그 자체였습니다. 그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순국하셨습니다. 이것이 언론에 펴지자 전두환 정부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개논리를 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물론 국민들도 분개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거기에 핵폭탄급 발표를 했습니다. 4월 13일 종북좌파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심하니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당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국민이 아닌 자칭 국민들의 대표라고 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방식이 헌법에 박혀 있었습니다. 물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투표하는 의원은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했습니다. 

 

즉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유지라는 목적으로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자신을 뽑도록 하기 위해 기존에 헌법을 수호하는 조치를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한열 열사는 재학중 중앙 동아리인 '만화사랑'을 창설하였으며, 학생운동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동아리는 당시 학생운동권이 대중과 멀어지자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쉽게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대놓고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면 무사하지 못할 시대였기 때문에, 만화나 음악 등등 명목을 붙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 구심점으로 삼는 사례가 잦았습니다. 그런데 이한열 열사는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동아리가 '만화 동아리'를 표방하고 있으니, 만화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부원 중에서 만화를 가장 열심히 배웠고 이러한 열정에 힘입어 민중 화가를 불러다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한열 열사는 운동권 학생들과 진짜 만화가 좋아서 들어온 학생들 간의 가교 같은 존재였으며,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성실했던 학생이었으며 동기들은 "집회 후 항상 학생회관 휴게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시위를 기록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그는 학생운동과 공부 양쪽에서 성실했고, 사상서만큼이나 영어 공부에도 열중했습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는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날 오후 4시 40분경 학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운동권이던 도서관학과 2학년 생 이종창은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전투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열사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수평으로 직사 된 최루탄에 후두부를 피격당하고 말았습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열사를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 열사를 끌어안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습다. 이종창은 이한열 열사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며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 열사를 부축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이한열 열사는"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때 이한열 열사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고 게다가 신체 면역력 저하로 인한 폐렴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이한열 열사는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발견한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다음날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면서 국민들은 공분했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됩니다. 결국 참다못한 국민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것이 6월 민주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한편 연세대학교에 경영학과 학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예비역 출신은 물론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학생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습니다. 당시엔 이런 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개헌을 하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뜨거워던 6월 민주항쟁이 국민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한열 열사 본인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자신의 눈으로 보지도 못한 채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진지 25일 만인 1987년 7월 5일 오전 2시 5분에 21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훗날 더민주 원내대표가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결식장에서 이한열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재 배우로 활약 중인 우현 총학생회 사회부장은 영결식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영결긱은 이한열 열사의 마지막 말인 서울시장 앞을 포함하여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 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신 이한열 열사의 삶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삶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자유를 가져다준 6월 민주항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성실했고 자신한테 떳떳한 이한열 열사의 삶을 영원토록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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