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6.25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2023. 6. 25. 02:22한국사


오늘은 6월 25일, 한국사와 민족사적으로 제일 비통하고 참혹한 6.25 전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6.25 전쟁의 아픔과 비극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 말에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고 했듯이 3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대한민국을 심폐소생술을 시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어 버리게 한 영웅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이 영웅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물론 모든 6.25 전쟁의 참전용사 분들이 대한민국의 영웅이지만 오늘의 주인공이신 이 분의 어마무시한 업적들을 보면 말문이 막힙니다. 이 분은 일제로부터 항거한 독립운동가 이시고 6.25 전쟁의 장군으로 참전하신 참전용사이시며 군사독재에 맞서 항거한 민주투사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정치적 이념을 떠나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할 업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장군이시자 유일무이한 오성장군이시며 6.25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을 소개합니다. 

6.25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6.25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은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김진건(金振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7살도 되기 전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고향인 용천이 전쟁의 첫 전투인 압록강 전투에 휘말리는 바람에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외세에 짓밟히는 망국의 설움을 느꼈으며,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길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홍일 장군이 10살이 되던 1907년에 대한제국군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정미 7 조약으로 해체되고 13살 되던 해에는 조국인 대한제국마저 강제로 국권이 피탈당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살기 싫었던 그의 집안은 만주의 선양시로 이사를 갑니다. 
 
이후 중국 학교에 입학하신 김홍일 장군은 중국어를 전혀 못하여 동급생들에게 인종차별까지 당하셨고 결국 소외감을 느껴 곧 자퇴했습니다 대신 그는 다시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우신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고, 졸업한 이후에는 이승훈 선생의 주선으로 황해도 신천군의 경신학교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다. 하지만 민족학교들을 예의주시하던 일본 경찰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으며 김홍일 장군 또한 일본 제국 육군 헌병에 잡혀 고문과 회유를 받았고,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을 뿐 아니라 석방된 후에는 집 밖 30리 이상을 넘어갈 수 없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만주에서 사업을 하던 형의 권유에 따라 쑨원의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 후 김홍일 장군은 다양한 방법으로 군관학교에 지원하셨고 그러던 중 개천절 기념 행사장 만찬자리에서 만난 항일구국단 단장인 중국인 항일운동가 황제의 도움으로 귀주 강무단에 입학했습니다. 
 
중국어를 잘 못하신 김홍일 장군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강무당에서의 정식 과정인 전술, 축성, 병기, 지형, 기마, 측화 및 보병교련을 비롯한 다양한 훈련 과정을 수료하셨고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에는 후난성에 있는 병과학교인 육군실시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 산포 병과 교육을 이수하고 2차 호법운동이 벌어지자 하응흠(허잉친)의 혼성여단 소속 기관총소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콜레라예 감염되어 후방 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려고 상해에 도착했으나 당시 임시정부는 개판 오 분 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 러시아 연해주에 서일 장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연합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김홍일 장군은 러시아 자유시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어렵사리 만주를 통과한 중간경유지인 이만(Има́н)[29]에 도착했을 무렵, 자유시에서는 자유시 참변이 벌어져 많은 독립운동 부대가 볼셰비키에게 몰살당합니다. 이후 김홍일 장군은 은 자유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만에서 현지 한인 공산당연합회와 연대하여 군비단을 고려혁명의용군으로 개편했습니다. 1922년 일본과 손잡읕 러시아 왕정파인 백군이 독립군을 공격하자 퇴각 도중 블로차예프카서 공세를 막아냅니다. 이후 김홍일 장군은 한인특립보병대 연대장으로 임명됐지만 부대 내 파벌싸움으로 부대가 해체됩니다. 부대가 해체되자 김홍일 장군은 잠시 만주에서 교사를 하다가 일본 헌병에 쫓겨 다시 국민당에 들어가 북벌에 참여합니다. 
 
북벌이 끝난 후에는 상하이로 돌아와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19로군 정보국장등을 역임했습니다. 1931년에는 국민정부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준비하여, 일본군의 포병 병과학교인 육군야전포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습니다. 이후에는 국민혁명군 상하이 강남기기제조총국 주임으로 있으면서 무기 생산을 감독했는데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이 폭탄이 필요하다며 제조를 부탁했고 김홍일 장군은 폭탄 3개를 제조합니다. 그 폭탄들은 도쿄 한복판에서 이봉창 의사의 의해 천황이 탕 마차에 던져졌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서 열린 천황 생일파티에서 윤봉길 의사가 생일 선물로 물병 폭탄을 던져 축포를 터트렸습니다. 즉 우리가 익히 알던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만드신 분이 바로 김홍일 장군입니다.
 
이에 일본은 김홍일 장군을 죽이려고 중국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장제스의 국민당이 도피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됩니다. 다음해인 1938년 일본군은 기어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우한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교통과 산업 중심지였던 우한을 점령해 중화민국을 항복시키고자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40만의 병력을 끌어모으는 등 총력을 다했습니다. 이에 김홍일 장군은 국민당에 장교로 참전하여 만 가령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고 이후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워 1939년 5월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임명되어 상가오 전투, 2차 창시 전투서 맹활약하셨습니다.
 
이후 중국 국민혁명군 최고위 군사교육기관인 육군대학 특별반(2년 과정)에 입교해 육군대학에 있으면서 당시 미군 고문단, 구미 시찰단 등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선진 군사학을 익히고 연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45년 5월 김구 선생의 권유로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부임합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으나 김홍일 장군은 바로 귀국하지 않고 다시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동북 만주와 간도에 있던 우리 민족을 보호하는 한교사무처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김규식 선생과 유동열 장군이 귀국을 권하자 1948년 8월 29일 귀국합니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이전의 풍부한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고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로써 김홍일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1949년 3월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어 육군사관학교에 교장으로 쟤직하여  국방개론을 저술하였고 1950년 6월 10일 육군 참모학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보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김홍일 장군은 즉각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지연 전을 펼치자 했으나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와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이 반대하였고 설상가상 이튿날인 6월 27일 북한군은 의정부까지 함락시켰습니다. 결국 6개 사단과 부상병들이 제대로 철수하기 이전에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키고 북한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여 대부분의 국군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1사단 사단장인 백선엽 장군마저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였습니다.
 
즉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시스템 자체가 아예 붕괴되었고 대통령인 이승만은 국민과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버리고 부산으로 도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김홍일 장군이 대한민국의 구세주로 등장하여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하고 휘하 병력은 커녕 참모조차 없던 1인 사령부를 패퇴하던 병력을 수습하여 3개 사단으로 구축해 냅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약장을 떼어내고 한강변에 달려가 병사들과 싸우면서 뗏목을 타고 한강으로 남하하려고 했다고 적혀있으며 그렇게 한강을 도하하여 남하한 국군의 모습은 병사는커녕 제대 따윈 필요 없는 패잔병의 상태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패닉에 빠진 병력을 수습하고 어느 정도 부대의 형태를 갖추게 한 김홍일 장군의 업적은 기적과도 같은 대단하고 경이롭기까지 한 놀라운 능력인 것입디다.
 
그리고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북한군의 도하예 대비하였고 또한 더글러스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였고 현재 부족한 탄약과 무기의 공급, 그리고 미 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약 1-2주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며 미국의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연 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칠천량에서 붕괴한 조선 수군을 이순신 장군께서 재건하여 명량에서 기적적으로 일본을 막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전투입니다.
 
이후로도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고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안강-기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그러나 미국 군사고문단과의 갈등으로 1950년 9월 1일 다시 육군종합학교에 교장으로 전직되고 이듬해인 1951년 중장으로 예편되어 퇴역하십니다. 이래서 중화민국 소장과 대한민국 중장을 합해 오성장군이라고 불리시는 겁니다. 
 
이후 김홍일 장군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외무부 장관이 됩니다. 그러나 2년만 군정을 시행한다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자 김홍일 장군은 외교부 장관을 사퇴하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 입당합니다. 또한 1965년 한일협정에 반발하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신민당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유신과 군사독재에 반발하셨으며 대한광복회 초대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1980년 8월 8일 폐렴으로 효창동 자택에서 향년 81세의 나이로 타계하셨습니다.
 
오늘은 6.25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김홍일 장군의 애국심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심이자 참된 군인정신일 것입디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걸 바치신 6.25 전쟁 참전용사 분들을 추모하는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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