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일과 친일파의 의미와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 그리고 역사상 극악무도한 최악의 친일매국노 윤덕영!!

국치일과 친일파의 의미와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 그리고 역사상 극악무도한 최악의 친일매국노 윤덕영!!

2023. 8. 29. 00:33한국사

오늘은 8월 29일 국치일입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여 35년 11개월 동안의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식민 지배의 시작이자 우리 민족의 엄혹하고 어두운 시대에 서막이었습니다. 한 국가가 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민족에게도 통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의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와 친일파입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지만 매국노와 친일파들도 분명히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매국노와 친일파가 생겼을까요?? 또한 역사적으로 가장 극악무도하게 악랄했던 친일파는 누굴까요?? 오늘은 국치일과 친일파의 의미와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 그리고 역사상 극악무도한 친일매국노 윤덕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국치일과 친일파의 의미와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 

먼저 국치일의 의미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친일파의 뜻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친일파란 단어는 친할 친(親) 자의 해 일(日) 자를 사용하여 사전적으로 볼 때 '일본을 좋아하고 친한 사람들'이라는 가치중립적 단어이긴 하나, 한자를 더 뜯어보면 친할 찬(親 자는 단순히 친한 뜻만 있는게 아니라 친부, 친모, 친자, 양친 등 부모님, 불교적 용어로 하늘의 도리로 형성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관계인 천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머니 아버지랑 단순히 친하다고 해서 친모, 친부라 쓰질 않습니다. 즉 친일파의 친일은 단순히 일본을 좋아하고 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부모님과 같은 천륜적 관계로 인식하여 공경하고 종속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지칭합니다. 

 

이러한 친일적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서슴없이 일본 제국에게 협조하여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도와주고 반민족행위를 벌여서 혜택을 독점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하거나 위안부, 정신대를 독려하여 민족을 팔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즉 역사적 용어로서 친일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신념과 이익을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하고 부역하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파가 너무 남용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친일의 반대로 반일이라는 단어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는 평범한 일본 사람과 일본 문화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적 침략과 행태를 미화하고 위안부와 같은 비윤리적이고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왜곡하면서 옹호하는 일본의 집권당과 일부 비도덕적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마치 아예 일본이란 국가 자체를 싫어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심지어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고 비윤리적이고 반인륜적 행위를 왜곡하면서 옹호하는 대한민국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본의 대한 감정은 무작정 일본을 싫어한다는 반일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를 싫어하는 반일본제국주의와 그런 제국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자민당을 싫어하는 반자민당 감정이라고 지칭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바로 반민족적 생각을 가진 친일파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반민족행위자들, 즉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는 뭘까요?? 일본은 1867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근대 서양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개조하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1876년 운요호 사건 때 이양선으로 일본이 무력 시위를 하자 조선 조정은 격론 끝에 강화도 조억을 맺어 문호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일본과 통상은 텄다고 해도 조선 조정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880년 대, 우의정 박규수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본 책과 문물을 접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흠모하게 됩니다. 물론 김옥균의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니, 우리는 프랑스 같은 문화 군사 강국을 이루자'는 언급을 볼 때, 일본과 동급으로 조선을 생각했지, 결코 매국 행위를 하여 일본의 부하가 된다는 생각은 그들 역시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1882년 임오군란으로 전권을 잡은 대원군을 청나라의 도움으로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척족들이 청나라식 근대화 정책인 양무운동을 개화 모델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식 급진 개혁을 바랐던 김옥균의 개화당은 친일파란 누명을 쓰고 권력에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서양에 쓰러지기 직전인 청나라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건 확실했던 개화파는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완공 축하연에서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한때 고종의 신병도 확보하고 서울 요지를 선점한 그들의 정변은 성공하는 듯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으며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가 삽시간에 반격을 가하면서 4일 천하로 실패합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입니다. 결국 역적이 된 개화파는 일본으로 탈출했고, 조선에 일본식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터지고 외세에 도움으로 진압하러던 고종과 명성황후의 오판으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하라고 합니다. 결국 고종은 이를 수용했고 일본은 한때 역적이었던 개화파들을 고위 관료로 임명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파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한때 자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던 나라의 고위 관료로 임명된 개화파들에곈 애국심과 정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 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자 한일 합병은 피할 수 없게 되자 그 전만 해도 친일 세력을 발본 색원할 것같이 굴었던 민 씨 척족들과 이완용 같은 수구파들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얼굴을 싹 바꿨습니다. 1905년 외교권을 뺏긴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정미 7 조약, 기유각서 등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 치명적인 조약들마다 수구파들은 누구보다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각기 무리를 짓고 친일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즉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는 무능한 정부와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친일파, 매국노들에게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친일파들이 심어놓은 헌병 보조원, 즉 조선인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결국 1910년 강제 병합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은사금과 부동산 등은 물론 조선귀족 지위까지 나눠 받았습니다. 과거 대한제국이 부족한 재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주미 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넘어갔고, 개화파의 거두이자 왕실 종친 박영효는 28만원, 이완용은 15만 원, 박제순은 10만 원의 은사금을 받고 아주 떵떵거렸습니다. 즉 구한말 끝날 때까지 그동안 친일을 했든 친청, 친러였든 상관없이 합병 때까지 조선 조정에서 버틴 고위 공직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봐도 됩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주권과 자유를 한낱 돈 몇 푼에 팔아넘긴 날이 1910년 8월 29일이며 그마저도 일국의 고의 공직자란 작자들이 팔아넘겼으니 이들을 경술국적 이라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치욕스러운 날이니 국치일이라 합니다. 이것이 국치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 보다 더 극악무도한 친일매국노가 있습니다. 이완용은 나라의 외교, 국방, 사법권을 팔아넘긴 놈이라면 이 작자는 국가를 통째로 팔아넘긴 놈입니다. 지금부터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친일매국노 윤덕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 역사상 최악의 극악무도한 친일매국노 윤덕영!!

역사상 최악의 극악무도한 친일매국노 윤덕영은 1873년 12월 27일 서울 태생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며 후작 윤택영(澤榮)의 형이며 할아버지 윤용선은 오랫동안 의정 대신을 역임한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였습니다. 1894년 윤덕영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것이나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된 것 등 윤덕영이 관직에 오르는데는 모두 할아버지 윤용선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기반 위에 윤덕영의 권세를 확고하게 해 준 것은 동생 윤택영의 딸인 조카가 순종의 황후로 책봉되었고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 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도 겸하였는데 이로 인해 궁중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외척 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이 관여합니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용구, 이완용을 필두로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식민 지배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부르짖으며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대신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회유 및 협박하여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여 합방 계획을 어느 정도 진전시켜 나갔는데 이제 남은 것은 고종을 포섭하여 허락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한 이토 히로부미에 뒤를 이어 제3대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여론의 귀추를 살피면서 합방을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황실을 설득해야만 하였는데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황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윤덕영을 그 적격자로 삼기로 하여 윤덕영을 비밀리에 관저로 초대하고 합방의 불가피성을 주지 시킨 다음 적극적인 협력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윤덕영에게 각의를 거쳐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되었으며 각 방면 대표자의 합의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 조선의 이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면서 고종 및 순종의 양해를 얻는데 진력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이며 순정효황후 아버지이자 순종의 장인어른과 형제인 윤덕영은 데라우치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합니다. 사실 친일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은 고종에게 7일간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한일합방조약에 대해 결단을 촉구하고 설득을 했지만, 고종은 대꾸도 하지 않고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종의 단호함에 이완용은 포기를 하고 돌아갔고 이에 일본이 실망했다고 합니다. 이때 윤덕영이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여 고종에게 찾아가 부탁을 했지만 역시 고종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윤덕영은 덕수궁 모든 창고를 봉인시키고 물건을 관리하던 상궁도 내쫓았는데 고종이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고종의 과거 여자 문제로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단호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고종이 주저앉으면서 시선을 피하자 윤덕영이 고종 앞으로 가서 서서 말하기를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안 움직이겠습니다."라며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서 있었다고 하는데 고종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순종을 한일병합조약식의 보내기로 했다.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는데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은 사람은 이완용입니다.

 

그 이유는 이완용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더 좋아했고 윤덕영은 실속을 챙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 회의에 윤덕영과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했으며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중 옥새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숨어서 몰래 듣고 있던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낚아 채 들고 울면서 도망치다가 앉아서 자신의 치마 속에 숨기는 등 온몸을 던져 항의했고 그 누구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자 큰아버지 윤덕영이 나서서 황후의 치마 속에 손을 넣고 옥세를 빼앗아 순종의 손을 잡고 한일병합조약이 찍어버립니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즉 윤덕영은 나라를 팔아먹기 위하여 일국의 황후이자 자신의 조카를 성추행 하고 강제로 옥새를 찍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짓을 벌여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때 받은 것 중 하나가 현재 가치로 230억짜리 저택인 벽수산장입니다. 군신 간의 예의나 종친 간의 의리를 도외시한 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 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 합방의 배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는데 윤덕영 또한 한일 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것없었습니다. 이는 합방 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에게 친일파의 대명사로 이완용을 떠올리게 된 겁니다.

 

그 외에도 윤덕영의 경악스러운 친일 행위는 계속되는데 1917년 이완용이 고종에게 도쿄로 가서 다이쇼 덴노에게 "한일합방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직접 말해라"라고 하자 고종이 "난 그 짓 절대 못 한다!"라고 반항했고 보다 못한 윤덕영이 왕가의 사적 재산들에 직접 빨간딱지를 붙이고 궁인들에게 "이거 때면 가만 안 둔다"라고 엄포를 놨습니다. 그래도 고종이 거부하자 이젠 고종의 과거 여성편력을 폭로하겠다 협박했지만 나는 못한다며 계속 거부하다가 결국 순종을 도쿄로 보내겠다고 사실상의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같은 친일파 윤치호가 말하길. "저자의 친일은 영어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 공채 5만 원을 받은 그는 1917년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 왕실의 참배를 종용하였으며 이왕직 장시사장,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친일파의 의회인 중추원 고문이 되었습니다.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릅니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 주택인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는데 송석원의 안방 마님으로 이길선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원을 준 일화가 있으며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 대책 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수는 일제의 전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 여성 단체인 '애국금차회'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 운동에 앞장을 섰는데 남편의 반민족 행각에 걸맞은 내조를 한 셈입니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왕실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 천수를 누리고 사망함으로써 그 극악무도한 친일의 막을 내렸습니다. 

 

오늘은 국치일과 친일파의 의미와 친일파가 생겨난 이유, 그리고 역사상 극악무도한 친일매국노 윤덕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국가를 팔아먹고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다시는 이 땅에 안 나타나서 다시는 민족과 국가의 치욕스러운 날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분들의 위상과 공로를 드높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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