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5. 02:01ㆍ한국사
오늘은 9월 15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린 세기의 작전이 펼쳐진 날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6.25 전쟁의 전세를 한 번에 뒤집어 버리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단숨에 수도인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대대적인 반격작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듯 인천상륙작전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명운을 쥔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고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전격적인 대한민국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후 전쟁 초반 북한 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했습니다. 이에 단 3일 만에 수도인 서울을 함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으로 도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요코하마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6월 29일 도착해 김홍일 장군의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본격적으로 참전을 결정한 후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구상을 하였고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7월 22일 미제 1기 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RCT)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 (Operation Bluehearts)이 만들어졌으나 전황이 악화되고 미 본토에서의 상륙부대 배치가 늦어지면서 취소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전략은 이른바 폭풍 작전으로 인민군이 유엔군과 국군을 밀어붙인 후, 좌우 양 측면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위아래를 보자기로 감싸듯이 섬멸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6.25 전쟁 초반부터 8월 초까지 먹혀들어 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그만큼 인민군은 더욱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전투, 김종오 장군의 춘천 전투, 손원일 제독의 대한해협 해전 등에서 인민군을 지연시키면서 폭풍 작전은 사실상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초가 되자 유엔군과 국군은 더 이상 밀릴 땅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나다가는 동해와 남해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습니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낙동강 전선, 일명 부산 교두보 전투의 시작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북쪽과 서쪽의 2면만 방어하게 되자 더 이상 인민군에게 양측면을 노출시키지 않게 되자 인민군은 이제까지 재미를 봤던 포위, 섬멸 작전을 아예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엔군은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하여 병력과 무기, 전쟁물자를 빠르게 보급받게 되면서 인민군이 6.25 전쟁 초기에 누렸던 병력과 무기에서의 우위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8월 말이 되었습니다. 단기전을 예상하여 최소한의 전쟹물자만으로 침공한 인민군은 이미 대다수의 부대가 커다란 병력 손실을 입어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으며 보급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식량, 무기,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병력을 대신하여 투입된 병력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민군은 9월 공세를 준비합니다. 1950년 9월 1일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최후의 공세인 낙동강 대공세를 감행했습니다. 인민군은 아직까지는 병력과 무기 측면에서 유엔군과 국군을 거의 압도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인민군은 5개의 공격축을 구축하였는데 우선 동쪽인 경주를 공격했고, 대구와 가산을 포위했으며, 낙동강을 다시 도하하여 영산을 향해 진격했고, 남강과 함안을 통해 마산을 점령하고자 하는 6.25 전쟁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폭풍 작전의 실패로 전쟁물자를 빠르게 소진한 인민군은 효율성이 크게 감소한 상태였고 결국 결과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였습니다. 즉 유엔군과 국군은 인민군의 파상공세를 강인한 애국심과 효과적인 방어로 막아냈으며 두 번에 걸친 파상공세의 실패로 인민군은 병력과 자원이 급감하게 되었고, 공세 위주의 전략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북한군은 공세의 실패로 인해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도 버겁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맥아더 장군은 7월 22일에 연기됐던 미제 1기 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이 인천에 상륙시킨다는 블루하츠 작전을 다시 재추진합니다.
그러나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인천이 아니라 전라북도 군산시였습니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북한군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인천의 자연적으로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인천은 자연적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해안 절벽과 썰물 때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어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지형을 가진 지역입니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 제독은 "성공률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일부 참모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끈질기게 인천에 상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면서 8월 28일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이 미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인천에서 치를 예정인 전투와, 인천까지 상륙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손원일 제독에게 획득하라 지시했고 8월 17일 해군 첩보부대가 인천에 삽입하는 이른바 X-ray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해군 첩보대는 인천에 잠입해 장비들과 병력들의 배치,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 정보를 수집했고,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했습니다. 그러나 9월 14일, 해군 첩보부대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었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허여 그들이 벌어준 시간 덕분에 해군 첩보대는 무사히 퇴출할 수 있었습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게 생포될 경우 고문으로 인해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했습니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 했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11번 함 PKG-722·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 했습니다.
또한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상륙작전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일부러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습니다. 즉 인민군을 교란할 양동작전을 했었는데 양동작전이 펼쳐진 곳으로 남한 지역에는 삼척시, 군산시, 북한 지역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마량도, 남포시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 인천상륙작전만 봐도 인천에 상륙한다고 해서 D-day(9월 15일)에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한 번에 공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졌는데 교란 및 기만작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습니다.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월미도를 비롯해서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뿐만 아니라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하여 포격을 했습니다.
한편 북한군의 공세가 낙동강에서 저지된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은 역습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북한에 UN군이 후방에 상륙작전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고, 김일성 또한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UN군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수긍했습니다. 중국 측에서는 서해안의 남포, 인천, 군산과 동해안의 원산 모두 후보지로 예상했습니다. 또한 미군이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예측하다 보니 정확히 한 군데를 찍어 집중적인 방어를 펼치기가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설령 한 곳만 주공이고 나머지가 조공이라고 해도 모두 다 대비해야 하는 데다가 어느 한 곳이 제대로 뚫리면 그쪽으로 주공이 전환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도 린뱌오와 같은 전략가들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이 유력하다고 정확한 예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동의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라고 전문을 보냈고, 김일성 또한 나름대로 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기는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조선인민군 해군과 조선인민군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나름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그동안 한국군과 미군에게서 노획한 물자들을 부평에 집중시켜서 상륙작전 같은 상황이 닥치면 근방에 예비병력을 집중시킨 후에 물자를 나누어주고 무장시켜서 방어작전을 수행하려고도 했습니다. 덕분에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과 한국군이 조선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과 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옵니다.
그러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 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 육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하여 기껏 인천을 방어하기 위해 확보한 육군 병력도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가 날려먹는 삽질을 해버립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일성이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낙동강 전투에 투입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김일성의 전략은 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인천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전보가 올라오면서 최악의 삽질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한반도에 파견한 공군도 소련군 소속이란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위장했습니다. 스탈린이 돕기로 마음먹는다 해도 어차피 상륙 하루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인천의 북한군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 고베에서 출항한 병력은 포인트 아이오와와 사세보에서 출항한 함대와 합류하고 이후 포인트 아칸시소에서 부산에 출항한 함대와 합류 후 9월 14일 포인트 캘리포니아를 지나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습니다. 당시 규모는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으로 미국 225척, 대한민국 1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입니다. 그리고 9월 15일 0시 50분, 미군과 한국군, KLO의 연합 특공대가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 등대를 무혈로 점령하고 등대를 점등시켜 상륙부대의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으로 로켓을 퍼부었으며,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하고 USS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지휘부는 상륙시간(L-아워)을 06시 30분으로 확정하ㅂ니다. 미 해병대의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 대원들은 06시까지 여러 척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타고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했습니다.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06시 33분이었으며 미 해군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습니다.
전투기들이 불과 45M 전방을 기관총 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합니다.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추가로 2개 중대를 싣고 상륙했으며 북한군의 저항으로는 산발적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G중대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지했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습니다. 그곳에서도 북한군의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다.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됩니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의 산업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과 연결된 방파제를 차단하였으며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미 해병대 전차소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약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합니다. 투항하지 않고 동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은 미 해병들이 대동한 M4 A3 셔먼 불도저 2대에 그대로 생매장당했습니다. 미 해병들이 월미도를 휩쓸고 다니며 소탕작전을 계속했고, 08시 미 해병대는 무선으로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합니다.
그 후 10시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합니다. 이곳은 조선인민군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곧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쯤 소월미도의 점령이 완료됩니다. 이때까지 사상자는 미군은 부상자 17명이 전부인 반면, 북한군은 사망자 108명에 부상자가 137명이었으며 월미도 곳곳에 널려있던 동굴째로 생매장당한 100 ~150여 명을 더하면 사상자 수는 더 많을 것입니다. 이후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합니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선봉 상륙부대인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상륙돌격 준비를 마쳤고,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17 연대와 해병 제1 연대 역시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 타고 레드 비치인 인천항으로 돌격했습니다.
레드 비치의 상륙한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를 형성했습니다. 여기 탑승한 미 해병대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측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측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고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습니다.
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기에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습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북한군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습니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미 해병대 제5연대의 1대대와 2대대는 곧바로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을 개시했고, 일부 병력은 해안 경비를 맡으며 후속 상륙 병력을 도왔습니다. 인천 곳곳에 위치한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 갔습니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미군은 인천항의 독을 손쉽게 확보하였고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잔존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포위해서 일사천리로 소탕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습니다. 이어서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상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총지휘는 미 육군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병력의 총지휘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 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6.25 전쟁의 전세를 한번에 뒤집어 버리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단숨에 수도인 서울을 수복하고 9월 20일 무렵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한반도 내부의 육상교통의 중심 겸 집결지인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험산준령 지형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전쟁이라도 최전선 전투부대의 보급선을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애초부터 북한군의 보급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해 기존에 있던 철도 수송도 낮에는 열차가 터널 같은데 숨었다가 밤에만 살짝 이루어지고 철도가 파괴되었거나 복구 중인 구간은 보급품을 소와 말, 사람 등에 지우고 운반하던 실정에서 보급로 자체를 애초부터 산악지형이라 철도도 없고 도로도 빈약한 동쪽으로 돌릴 수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그나마 쓸만한 인원이고 우마고 죄다 낙동강 전선에 들이 붓 듯이 동원한 상태라 보급쪽에 추가로 동원할 능력이 크게 부족하며 이런 모든 문제를 무시하고 억지로 보급을 한다 해도 아주 잠깐도 버티지 못합니다. 우마차와 인력으로 사단급 병력의 보급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세계대전에서 증명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을 들은 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들은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북한군 중 12,000여 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10,000여 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병력이 없는 후방은 방어선을 구축할 틈도 없이 뒤로 쭉쭉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단숨에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열세에 있었던 6.25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버렸습니다. 더는 후퇴할 수 없던 궁지에 몰린 대한민국이 이 작전으로 역전의 카운터를 때려 전황을 북한군 우세에서 국군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반격의 신호탄을 울렸으며 이후 북한군은 종전 때까지 예전 같은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38선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 가능한 교통수단은 모두 서울을 거쳐갔고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38선 이남의 인민군에 대한 보급이 끊기고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의 한국군과 유엔군에 포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륙작전 성공 이후 이남의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오히려 한국군과 UN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하게 되면서 많은 군사학자들도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합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되는데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서 원산 지역의 바다에 대규모의 소련제 기뢰밭이 깔린 것에 직면하여 기뢰제거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한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합니다.
오늘은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어 놓은 세기의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물론 인천상륙작전의 후속 전략은 분명히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구한 세기의 명작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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